[역대정부 집권 3년차 (중)] 인사 파동, 대연정 무산, 재·보선 참패… 위기의 연속

입력 2015-01-06 03:01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집권 3년차였던 2005년을 고위직 인사 파동과 여당 내 계파갈등 폭발, 당청 불협화음, 정부 정책혼선 등으로 보냈다. 그야말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이 마주한 위기들과 상당 부분 닮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위기극복을 위해 ‘대연정’ 카드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민심도 이반돼 재보선에서 완패를 겪었다. 여당 안팎에서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노무현정부는 이를 해결하지 못했다. 박근혜정부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인사 파동으로 위기 시작=집권 3년차 참여정부 시련은 인사 파동에서 시작됐다. 2004년 탄핵을 딛고 일어선 노 전 대통령은 2005년 1월 개각을 단행하며 ‘이기준 교육부총리’ 카드를 내밀었다. 대학개혁 작업에 과감히 손을 대면서 국정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이 부총리는 서울대 총장 재직시절 사외이사 겸직, 장남의 대학 부정 특례 입학, 판공비 유용 논란 등이 불거지며 결국 사흘 만에 낙마했다. 이 부총리 사퇴의 책임을 지고 당시 김우석 비서실장, 박정규 민정수석, 문재인 시민사회수석, 김병준 정책실장 등이 일괄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인사 참패의 여진은 계속됐다. 그해 3월 현직인 이헌재 경제부총리(부인의 부동산 투기 의혹), 최영도 국가인권위원장(위장전입을 통한 부동산 투기 의혹), 강동석 건설교통부 장관(장남의 인천경제자유구역청 5급 직원 취직 과정에서 특혜 의혹) 등도 줄줄이 비위 의혹으로 낙마하며 정권의 도덕성을 흔들었다.

연이어 터진 철도공사(옛 철도청)의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 행담도 개발의혹 사건 등에 청와대 인사들이 관련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민심 이반은 가속화됐다. 특히 범정부 차원의 지원을 받았던 황우석 서울대 교수의 줄기세포 논문이 결국 조작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이에 대한 책임론까지 불거졌다.

인사 실패는 지난해 박근혜정부를 흔든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최근 연초 개각설이 부상하면서 여당 내부에선 청와대 인사 시스템에 대한 불안감으로 혹여나 ‘참사’가 재연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단국대 가상준 교수는 “현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소통 부재”라며 “인사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 협의하며 진행해야 문제 소지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계파 갈등, 당청 관계 불협화음으로 레임덕 자초=열린우리당은 2005년 선거 승률 ‘제로(0)’ 정당이었다. 4·30재보선은 0대 23, 10·26재보선은 0대 4. 그야말로 참패의 연속이었다.

4·30재보선 당시 열린우리당은 친노(친노무현)계, 중도파, 재야파, 개혁당파, 당권파 등으로 계파가 갈리며 당내 불화와 갈등이 만연해 있었다. 그해 1월 국보법 개정·폐지 논란 과정에서 터진 계파 갈등은 결국 지도부 총사퇴의 빌미가 됐다. 갈등이 봉합되지 못한 상태에서 선거를 준비하다 보니 선거 승리에 집착하다 상향식 공천 등 개혁 원칙을 버렸고, 선거 과정에서 ‘돈봉투’ 파문까지 일어났다. 당연한 패배였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노무현정부의 위기가 선거 패배 자체보다 선거 이후 극복 과정에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선거 참패 후 여당은 서로가 서로를 탓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돌입했고 당내 계파 갈등이 극에 달했다. 서로 삿대질하는 동안 여당의 지지도는 바닥을 모르고 내려갔다.

이는 최근 여권 내 친박(친박근혜)계와 비박계 간 알력다툼이 가시화되는 것과도 닮아 있다. 현재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당내 계파 갈등이 ‘당의 망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당장 4월 보궐선거를 치러야 하고 공무원연금 개혁과 경제 활성화 등 처리해야 할 현안도 많아 ‘당의 분열은 곧 공멸’이라는 우려가 크다.

계파 갈등은 당청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노 전 대통령은 위기 타개를 위해 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며 정치권을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정작 상대인 한나라당은 대연정을 “낮은 지지율의 수세 국면을 뒤엎기 위한 권모술수”라며 응하지 않았다. 그해 9월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노 전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회동을 가졌지만 인식의 간극만 드러낸 채 소득 없이 끝났다. 10·26재보선에서 패한 열린우리당은 또 다시 지도부가 총사퇴하며 책임을 청와대로 돌렸다.

정부는 8·31부동산종합대책을 내놨지만 입법 과정을 미적거리다 효과를 반감시켰고, 국가균형발전론 역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집권 3년차를 맞아서도 국정운영의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야당은 ‘아마추어 정부의 한계’라며 공세를 높였고 야당 지지율이 40%까지 상승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청계천 복원을 완료하며 단숨에 대권주자 반열에 올랐다.

전웅빈 기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