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요즘 ‘문건’ 파쇄 중이다. 최근 몇 년간 개인정보 유출사건이 잇따라 터진 데다 철통보안을 자랑하던 청와대 문건마저 밖으로 나도는 사건이 벌어지자 문서보안업체마다 문전성시다. 업체들은 파쇄 과정을 낱낱이 중계해 보여주는 첨단장비까지 갖추고 손님을 끌고 있다.
수요는 다양하다. 정부기관은 물론 금융기관, 대기업, 대학, 병원 등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서의 흔적을 지우느라 바쁘다. ‘완벽하게 보안을 유지하지 못할 바에는 외부에 맡기자’는 생각에 문서보안업체 문을 두드리는 곳도 늘고 있다. 다만 외부에 맡기다가 되레 보안 위험이 가중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0㎏ 이하는 택배로 받아 처리=국내 문서보안업체는 10여곳이 영업 중이다. 문서 파쇄·보관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파쇄는 8t 특수트럭을 몰고 고객을 찾아가는 ‘현장 파쇄’, 문서를 공장으로 옮겨 한번에 처리하는 ‘입고 파쇄’로 나뉜다. 입고 파쇄는 한번에 최대 10t까지 가능하다. 200㎏ 이하일 때 택배로 문서를 받아 처리해주는 곳도 있다.
파쇄 작업의 전 과정은 기계 가동과 동시에 곳곳에 달린 CCTV로 녹화된다. 끝나면 작업영상과 파쇄증명서를 발급한다. 비용은 무게를 기준으로 청구된다. 공공기관·대기업 등은 경쟁 입찰로 업체를 지정해 연간 단위로 계약을 맺곤 한다. 중소기업이나 개인 등은 수시로 맡기는 편이다. 의뢰가 몰리는 연말연시에는 한 업체에서 한 달 동안 800t까지 처리하기도 한다.
이런 업체의 고객층이 최근 부쩍 넓어졌다. 설립 15년을 맞은 한 문서보안업체 대표는 “초기엔 금융권 위주로 파쇄 의뢰가 들어왔는데 사회 전체가 개인정보 유출 등에 민감해지면서 관공서, 법무·회계법인, 통신사, 유통사 등으로 고객층이 확장됐다”고 말했다. 저작권 관련 소송이 늘면서 국책연구소 등의 연구자료, 디자인 도면이나 관련 자료의 폐기 의뢰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제2금융권과 대부업계에서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특징 중 하나다.
◇보안각서 쓰고, 아르바이트·재위탁 금지=2000년대 초만 해도 문서 파쇄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중요 문서를 일반폐기물로 처리하거나 고물상 등에 넘기기도 했다. 실외에서 태우는 일도 종종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인정보 유출 사고 등으로 정보보안을 바라보는 인식이 달라졌다. 개인정보보호법까지 개정되면서 고객은 늘었다. 대신 까다로워졌다. 문서보안업체 관계자는 “서비스 과정이나 파쇄된 입자의 크기 등을 꼼꼼히 체크하는 고객이 많다”며 “파쇄 의뢰를 하면서도 우리 업체가 개입하는 걸 불안해하거나 서비스 이용 자체를 비밀로 하려는 고객도 있다”고 했다.
업체들은 고객을 안심시키기 위해 여러 묘책을 내놨다. 모든 직원이 보안각서를 작성하고, 개인정보관리사(CPPG) 자격을 갖춘 전문가의 교육을 정기적으로 받는다. 고객과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아르바이트 인력을 고용하거나 재위탁을 하지 않는다’는 항목을 넣는다. 이를 어기면 형사처벌까지 가능하도록 한다.
세계정보파기국립협회(NAID)에 가입하는 업체도 늘고 있다. NAID는 정보 파기에 대한 산업표준을 제정하고 관련 장비를 인증하는 국제단체다. 시장 점유율과 기술력, 신뢰도 등을 심사해 합격한 업체에만 정회원 자격을 준다.
◇하드디스크 파쇄도 호황=문서보안업체들은 ‘디지털 문서’인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파쇄로도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하드디스크 파쇄 의뢰는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포맷한 하드디스크의 데이터를 되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실한’ 물리적 파쇄를 원하는 고객이 많아졌다. 업체 관계자는 “저장매체 시장이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로 옮겨가고 있어 기존 하드디스크를 완전하게 없애버리려는 고객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문서보안업계는 전자문서가 일반화되면서 종이문서가 줄고는 있지만 아직 문서 파쇄 수요가 감소하진 않는다고 분석했다. 업무의 최종 단계에선 여전히 문서 출력이 필요한 데다 보관기한이 남은 기존 문서량도 많기 때문이다.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임종인 교수는 “정보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기업의 신뢰도와 직결되면서 문서와 각종 디바이스를 전문적으로 폐기하려는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
[기획] 대한민국은 지금 ‘문건’ 파쇄 중
입력 2015-01-06 0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