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집단분노-분노의 힘] ‘정의 실현’ 에너지

입력 2015-01-06 03:12 수정 2015-01-06 18:09
‘땅콩 회항’ 사건의 장본인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지난달 17일 서울 서부지검에 출두하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청사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지훈 기자

잘 조직된 집단분노는 우리 사회에 쓰지만 몸에 좋은 '약(藥)'이 되곤 했다. 숱한 전관예우, 온정에 기댄 판결, 권력비리 등 묻힐 뻔했던 많은 부조리가 국민들이 토해내는 분노의 힘에 민낯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집단분노를 "사회를 긍정적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될 수 있다"고 평한다.

◇사회정의 실현 ‘원동력’…선진국선 이미 법제화=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운동이나 ‘갑질’ 남양유업 불매운동, 더 거슬러 올라가 장애아동 성폭행 ‘도가니’ 사건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건·사고가 집단분노의 손을 빌려 세상에 실체를 보였다.

분노의 목소리는 사건 공론화뿐 아니라 법적 심판과 정부 정책에도 영향을 미친다. 수도권의 한 판사는 4일 “(판결에 국민 법 감정을 반영하는 데는) 명과 암이 있을 수 있다”면서도 “중요 사건이거나 (국민의) 관심이 높다고 하면 ‘이 정도는 처벌돼야 한다’는 목소리를 사회적 합의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판결은 양형기준에 따라 일정한 범위 안에서 공정하게 내려진다. 다만 그 범위는 국민의 법 감정을 반영해 미세하게나마 조절할 수 있다는 얘기다.

선진국에서는 대중의 ‘분노 에너지’를 ‘건강한 논의’의 무대로 이끌려는 시도가 이어져 왔다. 프랑스, 스위스와 미국 일부 주에서 이미 법제화된 국민발안제나 주민발안제가 그것이다. 모두 사회 구성원들이 직접 헌법 개정안이나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우리나라는 1954년 2차 개헌 당시 국회의원 선거권자 50만명 이상이 찬성하면 법률안을 제안할 수 있도록 국민발안제가 채택됐다. 하지만 1972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이 제도를 폐지했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만일 국민발안제가 계속 유지됐다면 세월호 사건에서도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교수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포함하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에 500만명 넘게 참여했다. 국민발안제 취지에 따르면 이는 법을 만들거나 헌법을 개정하는 것도 가능한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각 지방자치단체는 일정 수 이상의 주민 동의를 얻으면 불합리한 행정절차 등에 대해 감사를 요구할 수 있는 ‘주민감사청구제’, 단체장 또는 지방의원 직위를 박탈할 수 있는 ‘주민소환제’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집단분노가 대의민주주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보완하게 만드는 장치다.

◇‘공론의 장’ 인터넷과 SNS=집단분노 현상은 인터넷·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발달과 맞물리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인터넷을 통해 분노가 확산되고 사회적 파장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2002년이었다.

그해 6월, 경기도 양주군에서 주한미군 2사단의 장갑차가 여중생 미선이와 효순이를 치어 숨지게 했다. 잊힐 뻔했던 이 사건은 같은 해 11월 피의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은 직후 한 네티즌이 “촛불을 들자”고 제안하면서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후 촛불시위는 집단분노의 ‘상징물’이 됐다.

이어 온라인 포털 사이트들은 앞 다퉈 일명 ‘신문고’ 게시판을 만들었다. 억울하게 숨진 피해자의 가족, 부당하게 해고당한 직원, ‘갑’에게 시달린 ‘을’의 하소연 등 수많은 사연이 게시판을 채웠다. 게시글은 네티즌들의 지지와 분노를 등에 업고 공론화됐다.

집단분노는 국민 스스로 ‘밀집의 힘’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이런 힘이 부당한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도 품게 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모두 한마디씩 할 수 있게 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모일 공간이 생기면서 개개인이 느끼는 분노가 하나로 결집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정부경 전수민 양민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