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광복 70주년을 누구보다 감회 어린 마음으로 맞는 이들이 있다.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투사들이 그 주인공이다. 현재 생존해 있는 분은 총 89명(해외거주 5명). 이 중 ‘힘이 있어야 조국을 되찾을 수 있다’며 광복군으로 변신해 일본 군국주의에 격렬하게 맞선 현대사의 산증인은 몇 안 된다.
상해임시정부 시절 백범 김구 주석의 기요비서(機要秘書)로 일했던 김우전(93) 선생이 바로 그런 분 중 한 명이다. 기요비서는 백범 선생의 기밀 업무를 수행하던 중요한 자리다. 독립군의 연락장교로도 활약했던 그를 을미년 새해를 앞둔 지난달 29일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만났다.
그의 집에 들어서자 곳곳에서 백범 선생의 향수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거실에는 김구 선생이 1944년에 내린 ‘기요비서 임명장’(사본·원본은 독립기념관 전시)이 걸려 있었고 서재에는 광복 직후인 1946년 백범이 직접 써 준 ‘愛國’(애국)이라는 대형 액자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흔이 넘는 고령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우렁찼다. 김구 선생과의 만남, 광복군 시절 및 활동 등을 얘기할 때는 젊은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나는 듯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그는 1시간30여분 동안의 인터뷰를 이런 말로 맺었다. “분단 70주년이기도 한 올해 나의 소원은 통일이며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목숨을 걸고 했던 독립운동의 마지막 종착점이기도 합니다.” 김구 선생의 비서다웠다. 김구 선생도 백범일지에서 “나의 소원은 하나도 대한 독립, 둘도 대한 독립, 셋도 대한 독립”이라는 명언을 남기지 않았던가.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내가 태어난 평안북도 정주군에는 애국지사들이 많았어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은 1907년 12월 고향에 민족정신 고취와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를 털어 오산학교를 설립했어요. 여덟 살 때인 1930년에 이승훈 선생이 학교에 동상을 하나 세웠죠. 당시 연설을 들었는데 감동적이었어요. 그때 선생처럼 나라를 위해 나도 무언가 해야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리고 독립운동을 한 친형의 영향도 컸습니다. 우리 형은 항일 언론투사였어요. 정주경찰서에 두 달 동안 구금되면서 모진 고문도 받았지요. 형을 면회하면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됐고 그때 잔인무도한 일본의 이런 만행을 국내외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죠.”
-광복군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됐는지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을 당했어요. 일본군에 입대한 지 몇 달 뒤 극적으로 탈출해 곧바로 광복군에 합류했어요. 광복군 군관학교에서 한국어 구령으로 된 제식교련과 군사 기초과목, 독립정신 교육을 받았으며 졸업할 때는 당시 중국 국민당정부 주석이었던 장제스 명의로 된 졸업장과 함께 중국군 육군 소위 임명장도 받았어요. 장준하(전 국회의원)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 윤경빈(14대 광복회장) 김국주(17대 광복회장) 동지가 모두 그곳에서 같이 졸업한 동기생들입니다.”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중국정부의 지원 하에 광복군을 발족시켰다. 총사령관에는 지청천 장군, 참모장에는 이범석 장군이 취임했다. 처음에는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던 광복군은 1944년 임시정부의 독립부대로 활동했다.)
-광복군에서는 무슨 활동을 하셨습니까.
“광복군 제3지대장이었던 김학규 장군의 부관으로 일하면서 한·미 군사합동작전에 대한 보고, 중국군사위원회로부터 승인을 받는 일 등 주로 광복군의 연락장교로 활동했지요. 미국 중앙정보국(CIA) 전신인 전략첩보부대(OSS)의 특수훈련까지 받았으며 ‘OSS 한글 암호표’도 직접 만들었어요. 국내에 상륙할 때 동포들에게 뿌릴 전단지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죠.”
(당시 OSS는 광복군과 함께 일본군 탈출 학도병을 교육해 한반도에 상륙하는 일명 ‘독수리 작전’을 준비했다. 광복군 중 일부는 OSS의 특수훈련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상륙작전 일보 직전 일본은 잇따른 원자폭탄 공격을 받고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이로 인해 광복군은 자력이 아닌 연합군에 의한 아쉬운 광복을 맞게 된다.)
-김구 선생이 기요비서로 임명장을 준 상황을 설명해주시지요.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1944년 4월 6일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에서였어요. 김구 선생이 주석 판공실로 나를 은밀히 부르시는 거예요. 독대였지요. 광복군이 한반도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런 사실을 조국에 있는 애국지사들이나 동포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러시면서 ‘OSS의 훈련도 받은 자네가 그 임무를 수행하는 데 적격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처음에는 김학규 장군의 부관이라 좀 망설였는데 백범 선생이 대뜸 ‘장군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했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힘껏 해보겠습니다. 중임을 저에게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수락했지요. 그러자 김구 주석이 바로 판공실 기요비서 임명장을 만들어 주셨어요. 극비로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옷에 숨기기 쉽게 종이가 아닌 명주 수건에 임명장을 써 주신거죠.”
-그럼 조국으로 들어와 그런 임무를 수행했는지요.
“그래야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어요. 모든 훈련을 마치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국내행 비행기편을 기다리던 1945년 8월 10일 중국 쿤밍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전혀 기쁘지 않았어요. 김구 선생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점, 국내 상륙작전을 하지 못하게 된 점 등을 생각하니 너무나 억울하고 화가 났어요. 그날 김구 주석은 ‘일본 제국주의가 망한 것은 잘되고 기쁜 일이지만 광복이 이렇게 외세에 의해 이루어지면 우리 민족의 앞날은 불행해진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뒤 상황이 백범 선생의 우려대로 흘러가지 않았나요?”
(김구 주석은 물론 김우전 선생, 임시정부 요인들은 광복 한참 뒤인 11월에야 일반인 자격으로 쓸쓸히 조국에 돌아오게 된다. 당시 미군은 신탁통치에 걸림돌이 된다며 우리 임시정부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았다.)
-광복 후에 하신 일은.
“백범의 사저인 경교장에서 살면서 선생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셨어요. 남북 협상을 위해 평양에도 동행했지요. 안두희의 흉탄에 백범이 쓰러졌을 때 저는 그 자리에 있지 못했어요. 어머니를 보기 위해 잠시 집에 갔다 왔는데 선우 진 동지가 ‘선생님이 저격당해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지요. 사흘 동안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어요. 빈소에서 꼼짝 않고 있었지요. 그리고 영정 앞에서 결심했어요. 결코 선생님에게 욕 되는 행위를 하지 말자고요.”
(그는 백범 서거 이후 정치계에 등을 돌리고 해운업과 건설사업에 잇따라 뛰어들었다. 대한해운공사 상무(1961년), 부산해운 회장(1964년)에 이어 1981년에는 신일건설 회장을 맡아 전문 경영인으로 입지를 굳혔다.)
-광복회장을 역임하셨는데.
“광복회장을 하면서 독립운동 유공자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현재 나라에서 공인한 독립운동 유공자는 1만여명(지난해 11월 기준 1만3744명)밖에 안 됩니다. 하지만 나처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50만명이 족히 될 것입니다.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그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 어떤 형태로든 뜻을 기려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말이죠.”
(2003년 광복회장에 취임한 그는 2년 임기 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모은 급여 1억원과 자신의 연금 5000만원을 독립유공자 증손자녀들을 위한 광복회 장학기금으로 기탁했다.)
-올해가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이자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인데요.
“독립운동을 했던 우리들의 꿈은 오직 한 가지였어요. 통일되고 독립된 강한 조국을 만드는 것이지요. 남과 북이 하나가 돼 치욕을 안겼던 일본을 넘어 세계 강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일본 스스로 위안부 문제 등 과거를 반성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겁니다.”
만난 사람=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
[인人터뷰] “남과 북 하나돼 日 넘어 세계 강국으로 가야”
입력 2015-01-07 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