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배럴당 50달러대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6월 100달러대에 머물던 것이 반년 만에 반토막 난 셈이다. 유가 폭락의 영향은 경제 분야에 머물지 않고 다른 분야로 일파만파 퍼지고 있다. 시민들의 폭동으로 이어져 정국 불안을 야기하는가 하면 정권의 위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란 핵 개발 등 외교 문제가 첨예하게 얽혀 있던 사안에 대해서도 힘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유가 폭락의 나비효과 ‘폭동, 정권 위기, 외교력 약화’=‘베네수엘라 폭동, 유가 폭락 탓인가?’ 영국 일간 가디언이 지난해 10월 16일 보도한 기사 제목이다. 지난해 초부터 이어져온 베네수엘라 폭동의 근본적 원인을 유가 폭락에서 찾은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원유 수출이 국내총생산(GDP)의 25%, 전체 수출의 95%를 차지한다. 유가 급락으로 돈줄이 끊겨 생산이 위축됐고 이것이 물가 급등으로 이어져 결국 폭동으로 연결됐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 정부의 올해 재정 수입은 지난해보다 40%가량 줄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예산도 20%정도 삭감키로 했다. 니콜라스 마두라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빈민들에 대한 사회복지 예산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미 민심은 등을 돌린 상태다.
올해 예산안을 다시 짠 국가는 베네수엘라뿐만이 아니다. 러시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감산 합의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예산안을 새로 편성했다. 당초 배럴당 원유 가격을 100달러로 가정했지만 이 기준을 80달러로 낮춰 잡았다. 이라크 역시 원유 수출가를 배럴당 70달러로 예상해 기존 예산안을 폐기하고 새로운 예산안을 오는 10일까지 편성키로 했다.
예산안을 다시 짜는 것은 단순히 숫자를 고치는 문제가 아니다. 긴축에 따라 서민과 빈곤층 지원이 중단된다. 재정 악화로 인한 통화가치 하락은 수입 물가를 올리고 생필품 가격을 치솟게 한다. 먹고살기 힘들어진 대중의 불만과 분노는 정권을 위태롭게 만든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폴 스티븐 수석연구원은 “OPEC의 상당수 회원국들은 균형 재정을 위해 배럴당 100달러 이상을 필요로 한다”며 “정부가 빈곤층을 지원할 수 없게 되면 정치적 소요와 격변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서방과의 외교전에서도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됐다. 서방의 경제제재 압력은 유가 하락 국면에서 러시아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핵 문제를 둘러싸고 서방과 대립하고 있는 이란도 국제사회에서 입김이 크게 줄었다. 이란은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 수준은 돼야 재정 적자를 면할 수 있다. 유가 하락으로 위기론이 대두되자 이란 정부는 안팎에서 핵 협상을 빨리 타결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엔저 정책으로 디플레이션 탈출을 꿈꾸던 일본은 유가 하락 때문에 내년까지 물가상승률을 2%대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달성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유가 하락에 웃는 미·중=미국도 경제적 측면에선 유가 하락이 청신호로 볼 수만은 없지만 외교적으로는 확실히 얻는 게 많다. 지난달 17일 미국과 쿠바가 53년 만에 이뤄낸 국교 정상화도 유가 하락의 영향이 컸다는 의견이 많다. 동맹국이던 러시아·베네수엘라가 동시에 경제적 타격을 받으면서 쿠바가 더 이상 미국을 적대시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미국은 남미 좌파 정부들과의 관계를 개선할 기회도 얻게 됐다.
지구촌 한쪽에선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석유전쟁을 즐기는 나라도 있다. 중국이다. 비축유 확대에 몰두해온 중국으로선 유가가 급락하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은 지난해 10월 사상 최대 물량인 1800만 배럴을 사들였다. 노무라 홀딩스의 원유 분석팀장 고든 콴은 “더 많은 전략유를 저가에 비축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라며 “중국이 OPEC 결정의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와 베네수엘라 정부는 경제가 더 곤란해지면 중국에 손을 내밀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으로선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더 확대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블룸버그는 “유가 하락에 타격을 입은 러시아가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더 적극적으로 매달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산하 연구기관 옥스퍼드 이코노믹스가 유가가 배럴당 40달러까지 하락했을 때를 전제로 세계 45개국의 경제성장률을 분석한 결과 가장 큰 수혜국은 필리핀으로 나타났다. 필리핀은 향후 2년간 GDP 규모가 평균 7.6%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고, 중국(7.1%)과 인도(6.7%)가 뒤를 이었다.
유가 급락의 최대 피해국은 러시아로 나타났다. 러시아는 유가가 40달러로 떨어질 경우 향후 2년간 GDP 규모가 평균 2.5% 쪼그라들 전망이다. 이것도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서방의 경제제재와 루블화 급락 영향을 배제한 조건 하에서 나온 분석이다.
세종=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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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1-06 03:06 수정 2015-01-06 1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