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제품 설명
이름 김영수(가명·32). 원산지 대한민국.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전국을 뜨겁게 달구던 1983년 여름에 태어났다. 초등학생 때부터 사교육 폭풍 속에서 ‘평범하게’ 자랐다. 영어 수학 미술 피아노 태권도 웅변 등 섭렵하지 않은 학원이 없다. 전인교육을 학원에서 시작한 셈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국·영·수’에 집중했다. 대한민국 입시 시스템에서 ‘국·영·수’는 절대 진리니까.
하교하면 교문 앞에 기다리고 있는 학원 버스를 탔다. 학원은 세상을 가르쳐줬다. 점수로 환산할 수 없는 경쟁력 혹은 능력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중학교 2학년이던 1997년, 외환위기라는 괴물이 찾아왔다. 건실한 대기업에 다니던 아버지가 실직했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래도 경쟁을 뚫고 대학에 들어갔다. 1학년 때부터 ‘스펙 쌓기’에 돌입했다. 현실이 얼마나 추운지, 중학생 때 이미 맛봤다. ‘취업의 전장(戰場)’에서 치를 전투를 위해 모든 것을 갈고 닦았다.
②제품의 기능 혹은 특징
초등학생 때부터 오랫동안 ‘학원 뺑뺑이’로 다져진 체력과 인내심을 갖추고 있다. 이른바 ‘취업 스펙 5종 세트’를 완비했다. 토익 점수, 제2외국어, 각종 공모전 수상 및 참가 경력, 대기업 인턴 경력, 어학연수까지 두루 갖췄다. 스펙을 만드는 데 상당한 비용과 땀을 쏟아부었다.
여기에다 열정도 있다. 싼값에 쓸 수 있는 ‘열정 페이’(열정이 있으니 쥐꼬리 ‘페이’(pay·월급)는 감수하라고 강요하는 세태를 꼬집는 말)에 최적화됐다. ‘로또’라고 불리는 대기업 취업을 지향하지만 비정규직 일자리에도 만족할 줄 안다. 저비용으로 고효율을 낼 수 있는 ‘다용도·다기능’이다.
가장 큰 무기는 절박함이다. 5년 가까이 일자리를 잡지 못해 온갖 단기 알바를 하고 있다. 어떻게든 직장을 다니고, 월급을 받고,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만원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으며 출근이라는 걸 하고 싶다. ‘땅콩 회항’에 삿대질하는 무엄한 자들이 아닌 납작 엎드리는 ‘병’(丙)이 되겠노라 다짐한다.
③안전한 사용을 위한 주의사항
지나치게 ‘열정 페이’를 강요하면 내구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무기력한 행복’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쓴 책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 등장하는 일본 청년들처럼. 장기불황과 취업난에도 일본 젊은이들의 행복도는 상승하고 있다. 나아질 희망이 없다보니 그냥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다.
적당하게 부려먹어야 한다. 불안한 삶은 미래를 앗아가고, 미래를 잃어버리면 분노만 남는다. 분노는 쌓이는 깊이만큼 폭발력을 얻는다. “미취업 청년들이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고 근로자 셋 중 하나가 비정규직인 고장 난 현실”이라는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개탄처럼 ‘고장 난 청춘’은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른다.
④애프터서비스(AS)
계약기간이 끝나면 버리는 2년짜리(혹은 4년) 소모품 신세인데 애프터서비스를 받으려고 하지 마시라. 비슷한 청춘들은 부지기수다. 그런데 청춘을 홀대하면 당신의 평안한 노후도 없다. 일본과 스웨덴은 1990년을 전후해 거품 경제 붕괴를 경험했다. 일본은 부동산 정책으로 경기부양을 노리다 2000만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대국’으로 전락했다. 반면 스웨덴은 연금 등 기성세대 몫을 줄이는 대신 무상보육 등 청년에 투자했다. 스웨덴 경제는 2000년대에 부흥했다.
지난달 정부가 내놓은 비정규직 종합대책은 곪은 상처에 ‘빨간약’(머큐로크롬)만 바른 꼴이다. 근로시간을 줄여 질 좋은 일자리를 나누고 청춘, 곧 우리의 미래에 아낌없이 투자를 해야 이따위 ‘청춘 사용설명서’도 필요 없어진다.
김찬희 사회부 차장 chkim@kmib.co.kr
[뉴스룸에서-김찬희] 청춘 사용설명서
입력 2015-01-05 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