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미국이 대공황을 겪고 있던 시절, 할리우드가 만든 상업영화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가 나오지 않는 대신에 멋진 자동차와 대저택을 소유한 부자들과 그들이 즐기는 화려한 파티 장면을 빠짐없이 등장시킨 일이었다. 실업의 고통 속에서 빈곤한 삶을 살던 대부분의 가난한 미국인들은 현실의 고통을 잊고 꿈을 꾸기 위해 극장을 찾아가곤 했다. 춤과 노래를 통해 행복한 세상을 그려낸 ‘뮤지컬 장르’가 탄생한 것도 이때였고, 당시 극장은 고단한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도피처였던 셈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전쟁과 가난으로 점철된 과거 시절을 돌아보는 영화가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안정적이며 발전한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지닌 오락적 기능이란 어디까지나 관객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실도 고단한데 영화까지 현실의 어려움을 다시 경험하게 만든다면 영화 보는 일이 결코 즐거울 수 없다.
한국의 고단했던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묘사한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도 이 같은 까닭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고난의 역사는 분명 한국인들이 경험한 사실이지만 현실에서 재현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너무도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담아낸 빛바랜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지금의 심정은 그때와는 사뭇 달라진 안정된 상태다. 극장에서 고난의 생활사를 돈 주고 지켜보는 일이란 결국 우리가 그러한 고난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역으로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국제시장’은 덕수(황정민)란 인물이 겪었던 6·25전쟁 속 흥남철수와 1960년대 서독으로 돈벌러 갔던 광부와 간호사들의 이야기, 그리고 베트남전 파병과 1983년에 있었던 이산가족 상봉 생방송 등 전쟁과 가난이 가져다준 한국 현대사의 힘들었던 경험들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고 있다. 오직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보며 우리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출 수 없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을 그린 영화를 보며 흘리는 눈물은 단지 주인공의 슬픔과 고통이 관객에게 전이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난을 이겨내고 가족을 지켜낸 주인공이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란 자랑스러움이 기쁨의 눈물이 되어 함께 흐르고 있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는 일은 이 영화가 제공하는 가장 큰 미덕이다. 주인공 덕수는 어린시절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아버지로부터 가족을 지키라는 부탁을 충실히 수행한 인물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낯선 외국의 탄광과 폭탄이 터지는 전쟁터를 마다 않고 자신을 희생해 왔다. 덕수가 부산 사투리로 아버지 사진 앞에서 하는 독백은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가까워올 때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진언이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덕수에게 아버지의 말씀은 당위적 명령이자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너무나 힘든 인생을 살았지만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만족할 만한 평가에 이르는 모습은 노년에 접어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하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딤후 4:7).
국기 하강시간에 애국가가 울리면 공원에서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아버지 모습에서 우리는 당시의 애국주의를 읽을 수 있다.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의 모습과 애국주의자로서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은 너무 보수적 정서를 드러낸다는 비판의 소리와 함께 영화의 가장 큰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하지만 가난한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면서 애국가를 들으면 눈물이 나던 그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국제시장’을 마음 편하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식민 지배와 전쟁을 겪은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공적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외국에 원조를 주는 공여국이 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2014년도에 우리가 제공한 원조금만 2조원에 이른다.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 정치 발전을 단시간에 동시에 이룬 나라 또한 대한민국밖에 없다. 우리가 아버지의 고단했던 삶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 32:7)
강진구(고신대 국제문화선교학과교수, 영화평론가)
[강진구의 영화산책] 아버지의 발견
입력 2015-01-03 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