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히스토리] 홍콩 경단녀 문제 해결한 ‘필리핀 유모’ 한국도 합법화?

입력 2015-01-02 02:31

경기도 분당에 사는 ‘워킹맘’ 김지영(가명·36)씨는 퇴근이 늦은 탓에 집에서 함께 먹고 자는 입주형 가사도우미를 쓰고 있다. 5살인 딸을 보며 가사일을 해 줄 한국인 입주 도우미는 구하기도 쉽지 않고 비용이 너무 높아 소위 ‘조선족 이모님’과 지낸다. 그런데 중국 동포도 수요가 많아지면서 임금 수준이 아이 한 명에 최소 150만∼180만원까지 높아져 부담이 만만치 않다. 그나마도 함께 지내던 이모님이 갑자기 그만둬 바꾼 것도 벌써 두 번이다. 그러던 김씨는 지난 12월 어린이집 선생님과 아이 관련 상담을 하다 필리핀 출신 베이비시터를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들었다. 교육 수준이 높고, 외국 생활 경험도 많은 소위 ‘강남엄마’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젊고, 영어를 사용하며 비용도 저렴한 필리핀 도우미가 인기라는 얘기였다. 선생님은 같은 반 아이 한 명이 실제 필리핀 시터와 지내고 있는데, 밝게 잘 지낼 뿐 아니라 영어 수준도 매우 높다는 사례까지 얘기해줬다.

이쯤 되자 김씨도 고민이 됐다. 영어교육은 ‘덤’이다. 도우미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지금 160만원에서 100만원대 초반까지 낮아진다면 큰 부담을 던다. 무엇보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친절하다’는 사실에 끌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김씨는 필리핀 도우미를 구하지 못했다. 뒤늦게 필리핀 가사도우미를 쓰는 일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영어도 되고 비용도 낮은 필리핀 ‘내니(nanny·유모)’ 구한다고요?

김씨처럼 ‘필리핀 도우미’에 대한 관심이 있는 워킹맘이 늘고 있다. 조선족 등 중국 동포가 상당수 대체해주던 육아·가사서비스의 비용이 갈수록 높아진 데다 조선족 관련 사건·사고들로 부정적 인식까지 확산됐다. 반면 과거 영국령이었던 필리핀 출신은 영국식 교육을 받아 영어 구사가 자유롭고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엄마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인건비가 중국 동포보다 월등히 낮다. 실제 필리핀 여성들은 이런 강점으로 세계 곳곳의 가사도우미 시장에 진출해 있다.

그러나 김씨가 확인한 대로 우리나라에서 이들을 가사도우미로 채용하면 대부분 불법이다. 우리 정부가 가사도우미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재외동포(F-4비자)나 결혼 이민자(F-6 비자) 등 사실상 내국인에 가까운 이들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취업비자의 일종인 방문취업(H-2) 비자도 일부 허용되지만, 이 역시 조선족이나 고려인 등 사실상 우리 동포로 볼 수 있는 국적자만 가능하다.

필리핀 출신 여성이 합법적으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방법은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이민자뿐인 셈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 필리핀 도우미를 쓰고 있는 상당수 가정이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 된다.

실제 지난해 1월 법무부 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는 필리핀 국적의 입주도우미 26명을 적발하고 이들을 고용한 22명에게 총 9350만원의 범칙금을 부과했다. 당시 적발된 필리핀 도우미들은 대부분 단기방문(C-3)비자 등으로 입국했다 불법 체류하던 상태였다.

이 사건 이후 필리핀 도우미를 공개적으로 알선해주던 인력소개소들은 상당수 존재를 감췄다. 베이비시터 구인·구직 사이트나 육아정보카페 등에서는 필리핀 도우미를 구하거나 일자리를 찾는 필리핀 여성들의 글 등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필리핀 도우미’ 허용론, 맞벌이 문제 해결 vs 국내 여성 일자리 질 위협·가정불화까지 우려?

필리핀 출신 가사도우미를 국내에서도 허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저출산과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 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면서 이들의 가사·보육 노동을 도울 수 있는 저렴하고 질 높은 인력시장의 문호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도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초저출산 국가인 홍콩이 정부 차원에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국적의 가사도우미 인력을 수입해 공급하는 사례를 벤치마킹하자는 것이다. 홍콩은 ‘가사도우미 비자’를 도입하고 이들에 대해 주1회 휴무, 최저임금 수준 등의 근로 조건까지 마련해 공식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 같은 정부 정책이 홍콩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 전문가들 평가다. 싱가포르나 대만 등도 가사도우미 인력에 대한 별도 비자를 마련하고 있다.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초빙교수로 있는 권오규 전 경제부총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가 당장 해외에 문호를 개방할 수 있는 직종이 가사도우미”라면서 “여성의 육아·가사노동 부담을 덜어 여성의 사회 진출과 여성 인력 물꼬를 트기 위한 가사도우미 비자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불법 체류자를 고용한 경우 문제가 생겨도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법무부가 지난해 필리핀 가사도우미 단속을 한 계기도 불법체류 신분인 필리핀 여성이 가사도우미로 일하다 월급만 받고 잠적한 사례 등이 작용했다. 반대로 불법체류 자격으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 본인도 인권 침해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그러나 반론은 여전히 높다. 50, 60대 한국인 여성들이 상당수 차지하는 가사서비스 시장의 인건비가 전체적으로 낮아질 뿐 아니라 일자리 자체를 잠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맞벌이 여성에 대한 지원을 위해 저렴하고 질 좋은 인력을 도입하자는 주장이 많은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반대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낮은 중장년 저소득 여성들의 일자리를 뺏는 일이 될 수 있어 쉬운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문호를 넓히는 것이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정부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다.

한 정부 관계자는 “필리핀 여성의 경우 상대적으로 연령이 젊다 보니 미국 등에서는 불륜 등을 의심하는 가정불화가 심해져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면서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조민영 기자, 세종=윤성민 기자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