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Gypsy)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어릴 적 듣던 ‘집시 여인’이라는 노래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불가리아에서 루마니아로 오는 동안 드넓은 들판에서 간혹 마차로 이동하는 집시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떠돌이들의 삶을 엿보면서 ‘밤에는 별 따라 낮에는 꽃 따라’라는 노래 가사의 낭만은 무참히 깨져 버렸다.
루마니아는 집시들의 본거지다. 이들 중 적잖은 비율이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않고 자신들만의 길드를 조직해 살아가고 있다. 실제로 세습된 집시 왕 ‘이욘 플로린 쵸아바’는 BBC방송에도 출연할 정도로 절대적인 권력과 명예를 보장받고 있다. 현재는 자신이 진짜 집시 왕이라고 우기는 삼촌과 자리다툼을 하며 시비우(Sibiu)란 소도시에 살고 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집시족들이 매해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집시 축제를 여는데, 유럽 정부들은 해마다 반복되는 집시들의 대이동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거친 야성 때문에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길에서 체득한 민첩함으로 간혹 생존을 위해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일삼는다.
대부분 가난한 이들은 ‘계속 떠도는 부류’ ‘한철에만 유랑하는 부류’ ‘아예 정착한 부류’로 나뉜다. 2011년 9월, 루마니아에선 집시족과 10년 넘게 교류한 김재곤 선교사를 따라 솔다누 마을을 방문했다. 얼굴이 시커먼 자신과 달리 자녀들은 피부가 하얘서 좋다는 니쿨라에 요아나 할머니가 고단한 미소를 짓는다. 적어도 피부색 때문에 남들에게 차별이나 무시는 받지 않기 때문이다. 집시족의 힘은 낙천적인 성격에서 나온다. 하지만 오랜 세파에 많이 지쳐있는 듯했다.
이후 방문한 머야누 요아나 할머니 댁. 페트병을 수거해 생계를 이어가는 이 가정 역시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낮 시간 동안 일하러 간 자녀들을 대신해 할머니는 손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녀의 집 부엌을 들여다보니 세간이 엉망이다. 김 선교사는 가끔 이런 위생 상태에서 해주는 밥을 먹는다. 진심어린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서다.
루마니아 집시 부족엔 독특한 문화가 있는데 애가 태어나면 욕하고 침을 뱉는단다. “예쁘다”고 하면 귀신이 시샘해서 병에 걸린다는 믿음 때문이다. 아직도 집시 사회에서는 14세 정도면 여자아이를 시집보낸다. 시댁 될 집으로부터 돈을 받고 넘기는 식이다. 예쁘면 5000유로에서부터 얼굴 등급에 따라 그 가치는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신부는 시집 온 이후 노동착취와 폭력에 시달리기 일쑤다. 때리는 남편이나 맞는 부인 모두 그러려니 한다는 슬픈 얘기다. 부인은 시댁에서 받은 돈 때문에 정작 친정에서도 찬밥 신세가 된다. 억척스럽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고된 살이다.
아직도 집시부족이 세월 따라 바람 따라 유랑하는 낭만파로 보일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그들의 척박한 문화는 시대가 급속히 변하면서 이제 과도기에 접어든 조짐을 보인다. 한 번 문명의 맛을 보고선 이 방식에 편입하려는 집시족과 여전히 문명을 거부하는 집시족의 간극이 언제까지 평행노선을 달릴지 관심사다.
사실 안타깝게도 김 선교사에겐 집시족에 사무치는 아픔이 있다. 그의 어머니가 오랜 세월 전도로 관계 맺은 현지인 마을 교회에서 금품을 노리고 침입한 면식범으로부터 피살당한 것이다. 외지고 가난한 곳에서 사랑을 나누다 순교한 것이다. 어머니를 주님 품으로 보낸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다. 이웃이든 원수든 사랑밖에는 길이 없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황무지 같은 집시 마을에는 정말 소중한 이를 잃은 한 선교사가 가장 소중한 진리를 삶으로 보이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문종성(작가·vision-mate@hanmail.net)
[문종성의 가스펠 로드] (37) 목숨을 거는 사명 - 루마니아 집시족 방문기
입력 2015-01-03 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