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인터스텔라’ 속 물리학의 최전선

입력 2015-01-02 02:57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처음으로 구현한 블랙홀의 모습. 웜홀 이론을 개척한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이자 영화에서 과학자문을 맡은 킵 손은 “내가 이 이미지들을 처음 보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며 “사상 최초로 할리우드 영화에서 블랙홀과 그것의 강착원반이, 우리 인간이 항성 간 여행의 능력을 획득하면서 실제로 보게 될 모습대로 묘사되었다”고 말했다. 까치 제공
지난해 대중들의 지적 도전을 자극한 작품으로 책 ‘21세기 자본’과 영화 ‘인터스텔라’를 꼽아보면 어떨까. 둘 다 독해가 쉽지 않지만 베스트셀러로, 천만 영화로 각각 크게 성공했다. 관심도나 판매량으로 보면 두 작품이 한국에서 거둔 성적은 다른 나라들에서보다 훨씬 나은 편이라고 한다. 물론 ‘21세기 자본’을 완독하고, ‘인터스텔라’를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두 작품이 아니었다면 경제학과 물리학이 성인들의 밥자리 술자리에서 거론되는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현대물리학을 영화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에 출간된 ‘인터스텔라의 과학’은 영화를 현대물리학으로 풀어낸다. 이 영화가 기초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구성하는 과학적 개념과 이론을 설명하고, 이 영화를 보고 물리학에 흥미를 가진 이들을 이끌고 영화의 세계를 넘어 과학의 세계로 나아간다. 책을 읽어보면 ‘인터스텔라’를 천재 감독이 물리학자의 자문을 받아 빚어낸 SF영화라고 보는 기존의 논의가 다소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터스텔라’는 노년의 물리학자가 유능한 영화감독을 빌어 우주과학을 대중에게 프리젠테이션한 학술적 시도로 볼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과학자문 정도로 거명되는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의 이론물리학 명예교수 킵 손(Kip Thorne)은 사실 이 영화의 출발점이었다. 킵 손이 개척한 웜홀 이론을 영화가 구현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 70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토바이를 탈 것 같은 야성을 풍기는 이 과학자는 상대성이론과 중력, 웜홀, 블랙홀 등에 대한 세계 최고의 학자이자, 스티븐 호킹과 칼 세이건의 친구이기도 하다.

킵 손은 2005년 오랜 친구이며 할리우드의 이름난 제작자인 린다 옵스트와 영화를 구상한다. 그들이 생각한 영화는 “처음부터 진짜 과학에 기초를 둔 블록버스터 영화”였고, “물리학 법칙들이 우리 우주에서 창조할 가능성과 개연성이 있는 경이로운 현상들, 인간이 물리학 법칙들에 통달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성취들을 관객에게 맛보여주는 영화”였다. 또 “관객 중 다수를 과학 공부로, 더 나아가 어쩌면 과학자의 길로 이끌 수 있는 영화”였다.

애초의 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였으며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동생인 조너선 놀런이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썼다. 복잡한 사정들로 두 사람은 물러나고 2010년부터 크리스토퍼 놀런이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를 맡는다. 놀런은 책 머리말에서 킵 손에 대해 “그는 자신의 역할이 과학경찰이 아니라 이야기 공동 제작자로 여겼다”고 썼다.

1장 ‘할리우드에 진출한 과학자: ‘인터스텔라’의 탄생기’는 14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영화의 비하인드 스트리를 흥미롭게 들려준다. 킵 손은 여기서 ‘긴 토론’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관계자들과 ‘긴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제작자나 작가, 감독은 물론이고 그래픽 팀 등 스태프, 심지어 배우들과도 ‘긴 토론’을 했다. 여주인공을 맡은 앤 해서웨이의 경우 시간과 중력은 어떤 관계인가, 왜 우리는 고차원 공간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양자중력 연구는 현재 어떤 수준에 이르렀는가 등 놀랄 만큼 전문적인 질문들을 전화로 쏟아냈다고 킵 손은 회고했다.

쉽고 재미있는 건 거기까지다. 2장부터는 현대물리학이다. 영화를 소재로 하고, 분량이 많지 않고, 그림과 사진이 많고, 문체가 경쾌하다고 해도 평범한 독자들이 물리학 이론을 읽어가는 것은 역시 쉽지 않다. 책과 정면승부를 하겠다고 덤비다간 금방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 어려운 부분은 너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최대한 친절하게 쓴 물리학 대중서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행히 쉬운 부분도 꽤 있다. 이론에 대한 복잡한 설명이 아니라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 페이지들이 있다. 웜홀을 통한 성간여행은 가능한가, 지구 외의 다른 행성으로 갈 수 있는가, 병충해가 인류 멸절을 초래할 수 있는가 등 영화를 보며 갖게 되는 궁금증들에 답하는 형식이라서 접근도 쉽다. 특히 블랙홀이나 웜홀, 중력이상, 휘어진 공간과 시간, 제5차원, 테서랙트(4차원 정육면체) 등 영화에서 처음으로 구현한 이미지들의 세부 구조를 그림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은 독자들 각자가 과학을 좋아하는 만큼 빠져들 수 있도록 구성됐다. 현대물리학은 대중적일 수 없다는 편견은 ‘인터스텔라’ 열풍으로 이미 깨졌다. 어려운 구간을 만나면 건너뛰고 듬성듬성 읽어도 좋다. 그림이나 제목만 보면서 대충 엿보기만 해도 된다. 현대물리학은 어렵다고 외면하기엔 너무나 중요하고 또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