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물고자 하는 주제의식

입력 2015-01-02 02:59

과학기술 공포증이 있다며, 과학소설(SF)은 어려워 싫다는 사람에게 미국의 여류 SF 작가 어슐러 K. 르 귄(85·사진)은 이렇게 말한다.

“천체역학이나 양자이론을 이해하는 이는 SF작가 중에도 거의 없다. SF의 과학적 아이디어 대부분은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친 사람이라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르 귄의 SF 단편을 묶은 ‘내해의 어부’가 나왔다. 그에겐 ‘SF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단연 1순위’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미국에서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꼽히는 ‘내셔널 북 어워드’가 수여하는 ‘평생 공로상’을 올해 받았다. 그만큼 문학적 깊이를 갖췄다.

작가 인생 중반인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쓴 걸 묶은 이번 단편집 역시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물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인류학, 심리학, 철학을 넘나들며 변주된다.

표제작 ‘내해의 어부’는 어떤 어부가 하룻밤 바다 속 용궁에서 지내고 돌아오니 바깥세상에는 백년이 흘러 가족도 친구도 모두 사라지고 없더라는 일본의 우화를 차용해 겹겹이 쌓인 무한한 우주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유약한 인간의 존재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다.

과학이론 시간 이동을 소재로 했다. 21세 청년인 주인공 히데오는 ‘처튼 필드’ 이론을 통해 ‘순간 이동’을 연구하고자 또 다른 행성인 ‘헤인’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그 사이 원래 자신이 속했던 행성 ‘O’에서는 18년이 흘렀다. 부모님은 노인으로, 사랑했던 이시드라는 중년이 되어 다른 사람과 결혼해 산다. 결국 그는 ‘이중 필드’ 기술을 이용해 18년 전의 정오에서 딱 한 시간 뒤로 다시 돌아오는데….

단편집에는 ‘쇼비 이야기’를 비롯해 시간 이동과 관련된 작품이 다수 수록됐다.

소설에는 아침사람, 저녁사람, 다른 어머니, 다른 아버지, 가사근친, 단쌍결혼 등 생경한 미래 용어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과학적 상상력의 외피를 썼을 뿐 21세기 사회제도에 대한 고민의 산물 같아 진취적으로 읽힌다. 예컨대 ‘고르고니드와 한 최초의 접촉’에서는 아내를 무시하는 남편을 설정하면서 외계인과의 접촉을 계기로 가정 내 권력관계를 유머러스하게 전복시켰다. 국가나 주가 아닌 마을 단위의 사회를 지향하는 등 작가가 그리는 유토피아를 훔쳐보는 재미도 있다.

그러면서 진한 감동을 주는 건 사랑과 모성애 등 인간의 심연을 탐구하는 본격 문학의 주제가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주인공을 과거 시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힘은 다른 행성으로 떠난 후에 비로소 깨달았던 사랑이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