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이 수장하고 있는 조선시대 그림 36점이 한 권의 책 속으로 들어왔다. 1991년부터 간송미술관에서 근무하는 백인산 연구실장이 그림을 골라 해설을 붙였다. 올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전시로 시작된 간송미술의 외출이 더욱 활발해지는 모양이다.
‘간송미술’은 하나의 고유명사가 됐다. 1년에 두 번,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하루 수천 명씩 몰린다. 해마다 길게 늘어서는 관람객의 행렬은 간송전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이 행렬에는 간송미술관이 수장한 문화재의 가치에 대한 경탄뿐만 아니라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 선생에 대한 존경과 흠모가 더해져 있다.
조선시대 미술을 주제로 한 책들은 수없이 많지만 간송미술, 그것도 간송미술을 보존하고 연구해온 당사자가 쓴 책이라는 점에서 ‘간송미술 36: 회화’는 존재감이 뚜렷하다. 간송미술에 대한 대중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1000여점이 넘는 수장품 중에서 조선시대의 문화와 예술,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한 36점의 옛 그림을 골라 시대 순으로 보여준다.
첫 등장인물은 신사임당의 ‘포도’ 그림이다. 5만원권 지폐에 신사임당의 초상이 들어가 있다. 그 옆으로 ‘포도’ 그림이 배치됐다. 그럼 이 ‘포도’는 신사임당의 작품이 확실한가?
“그녀의 작품이 들어가야 했다면, 이 ‘포도’ 외에 마땅한 대안은 없었을 것이다. 학술적인 안목으로 평가한다면 주저되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이 대목에서는 조금 너그러워지고 싶다. 이 그림마저 아니라면 신사임당의 그림은 더욱 자취를 찾기 어려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은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린 화가가 아니었고, 48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타계했으며, 그녀의 작품이라고 전해 오는 대개의 그림들에는 낙관이나 관지가 없다. 그래서 ‘포도’는 “우리가 아는 사임당의 이름에 가장 가까운 그림”이 된다.
책 표지에는 신윤복의 ‘미인도’가 사용됐다. 그림 속의 여인은 누구일까? 조선시대에 여염집 여인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생이라는 것인데, 신윤복과는 어떤 관계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단서는 ‘혜원’이라는 글씨의 위치에 있다.
“혜원은 이런 의미심장한 제사를 쓴 뒤 한참의 공백을 두고 자신의 호인 ‘혜원’을 적어놓았다. 정확히 여인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이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하여금 ‘혜원’을 보게 하였다. 이 그림이 없어지지 않는 한 여인은 영원토록 ‘혜원’을 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진정 혜원의 의도였다면 무서울 정도로 절절하고 애달픈 연민과 사랑이 담긴 그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미인도’를 바라보며 품었던 은근한 탐심은 이제 그만두어야 할 듯하다.”
각각의 그림은 각각의 이야기를 들고 다가온다. 정선, 김홍도, 신윤복, 김정희, 장승업 등 잘 알려진 작품들이 많지만 조속, 이명욱, 유덕장, 조영석 등 비교적 유명하지 않은 화가들의 작품들도 포함돼 있다.
24년간 이 그림들을 자식처럼 돌보며 공부해온 저자는 “미술품은 거짓이 없는 역사 기록”이라며 “문화재의 아름다움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 속에 옛 선조들의 삶과 정신이 담겨 있다는 것, 나아가서 이것이 진실된 역사로 우리를 인도하는 다리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 간송의 그림들을 책으로 만난다
입력 2015-01-02 0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