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고승욱] 전문가의 자존심이 보고싶다

입력 2015-01-01 02:30

가수 신해철씨의 사망 원인을 감정한 대한의사협회가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달 전문가 9명을 모아 구성한 의료감정조사위원회의 최종 결론이다.

하지만 일반인 눈에는 도대체 무슨 소린지 결론이 보이지 않는다. 발표문은 애매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해석하기에 따라 의료과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좋게 표현하면 전문가의 신중함이고 나쁘게 말하면 황희 정승이다. 신씨의 변호인은 발끈했다. ‘제 식구 감싸기’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시민단체에서는 “수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절차가 의사를 보호하는 단체에서 이뤄지고 있는 점이 문제”라는 말이 나왔다. 의료사고의 형사기소율이 1% 미만이라는 수치가 다시 부각됐다.

하필 수술실에서 생일파티를 한 성형외과 이야기가 겹쳤다. 해당 병원이 사과문을 내놨지만 아랫사람인 간호조무사에게 책임을 돌렸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평생 가슴에 새기는 의사는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다. 추무진 의협회장은 2015년 신년사에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국민건강에 대해 전문가로서의 목소리를 낼 때 권위가 바로서고 신뢰는 회복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지금 듣고 싶은 것이 바로 당당한 전문가의 목소리다.

정확한 판단이 조롱받는 사회

최근 의사가 부각됐지만 전문가가 보이지 않는 건 그 분야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직업에 당당하고, 신뢰를 받는 전문가가 앞에 나서지 못한다. 2014년은 특히 심했다. 평생 바다에서 거친 파도와 싸웠던 선장은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먼저 달아났다. 최고의 전문가가 도망친 배에서 승무원들에게 비겁은 상식이었다. 정확한 판단력과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노련함으로 수백명의 생명을 책임지는 조종사는 ‘오너 부사장님’ 직함을 뛰어넘지 못하고 비행기를 후진시켰다. 원자력 분야에서 평생을 바친 과학자가 비리에 줄줄이 엮였다.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직업군인들의 성적(性的) 일탈이 신문을 장식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는 왜 잘못돼 어린 학생들을 괴롭히는지…. 올해 10대 뉴스에는 유독 전문가의 부재(不在)가 크게 느껴졌다.

제 자리에서 자신의 직업에 당당한 전문가들이 몇몇 미꾸라지 때문에 도매금으로 욕을 먹는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한 사람이 욕을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이 제 목소리를 못 내면서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찾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의제설정과 위기관리 기능이 급속히 위축됐다. 정확한 판단은 조롱받고 목소리 큰 사람이 왕 노릇을 한다. ‘떼법’이 법전 위에 군림하는 모습조차 종종 볼 수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댓글 다는 초딩’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뭔가 있어 보이는 의견인데 가만히 읽으면 쓸데없는 소리다. 이유를 알아보니 초등학생이 여기저기서 돌아다니는 말을 복사해 붙였다. 그런 게 여론이라며 전문가들을 압박한다. 하지만 법률가와 의사는 이미 돈벌이에 급급한 이익집단이고, 정치인은 결코 믿을 수 없는 거짓말쟁이며, 관료는 부패집단, 기자는 쓰레기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각 분야에서 전문가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제 분야에서 당당한 목소리 듣고 싶다

지난 정권에서 4대강 사업을 놓고 찬반 논란이 팽팽할 때 누군가 ‘이데올로기에 포획된 과학자’라는 표현을 썼다. 그의 말대로 과학자가 정치적 이유로 결론을 내려놓고 수많은 이론과 데이터를 동원했을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이데올로기 프레임에 갇혀 과학적 견해를 곡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든 서로의 의견차가 뚜렷한 사회의 핵심 쟁점에 전문가들이 의견을 내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중요하다.

그때부터는 어떤 합의도 이룰 수 없다. 대화는 무의미하다. 묻어두거나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힘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고소·고발 수준이지만 골이 깊어지면 주먹과 총으로 발전할 수 있다. 2015년이 시작됐다. 자존심 세고 강직한 최고의 전문가들이 곳곳에서 활약하며 존경받는 시대가 활짝 열리기를 기대한다. swko@kmib.co.kr

고승욱 온라인뉴스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