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도 13년 전 그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1999년 뉴욕에 있는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를 통해 평양 적십자병원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로 가지 못하다가 2001년 4월에야 평양 방문이 성사됐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 땅을 밟기 전에 여려가지 난관을 통과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비자가 없다고 하더니 이번엔 자리가 없다고 했다.
“평양은 왜 가시나요?” “심장수술 하러 갑니다.” “진작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
일행은 모두 6명이었다. 항공사 직원은 현장에서 탑승권 5장을 주며 나에겐 “선생은 동포시니까 미안하지만 승무원 자리에 앉아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정도 불편쯤이야 참아야겠지만 어쩐지 불안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우리는 비행기에 올랐다.
평양시내로 들어갈 때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먼 옛날로 돌아간 듯했다. 어릴 때 저런 논길을 따라 학교 다니던 기억이 났다. 대부분의 여인네들은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평양은 깨끗한 도시였지만 차는 거의 없었다. 고려호텔에 여장을 풀고 주일에 봉수교회를 다녀온 뒤 오후에 첫 수술을 하기로 하고 곧바로 병원으로 갔다. 30대 초반의 승포판협착증이 심한 환자인데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내일 있을 수술에 대해 설명한 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수술을 위해, 당신을 위해 기도해도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시죠.”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하려는 순간 갑자기 목이 메었다. 지난 세월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이 일을 준비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수술 준비를 마치고 수술실에 환자를 옮긴 후 마취를 했다. 환자의 심장 상태가 나쁜 줄은 알았지만 막상 마취를 하고 스완-간도관(swan ganz)을 넣었더니 오른쪽 폐압이 왼쪽 혈관과 똑같아진 중증이었다. 그런데 마취 기계가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느라 2시간이나 흘렀고 환자의 상태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또 믿음 없는 불평을 하나님께 하기 시작했다.
“첫 환자 수술도 못하고…. 이 환자가 잘못되면 다시는 여기 올 수도 없을 텐데요.”
그때 같이 간 마취과 의사가 말했다. “내가 약물로 최선을 다할 테니 가능한 한 빨리 수술을 하세요.” 수술은 시작됐고 준비해 간 인공판막으로 승모관을 갈았다. 나는 온 정신을 쏟아 수술을 끝냈다. 그런데 끝내고 보니 방 안 가득 들어와 참관하고 있던 의사들이 너무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선생님, 55분 걸렸습니다. 아니 45분 걸렸습니다.”
지금껏 소련에서 배운 방식대로 수술을 하면 적어도 4∼5시간 걸리는 수술을 1시간 내에 했다는 것이다. 하마터면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환자를 통해 우리를 높이셨다. 이 일로 그들은 심장수술을 우리한테 배우고 싶으니 앞으로 꼭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수술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왔다. 꼭 다른 세상을 다녀온 것 같았지만 하나님 음성을 듣고 이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북한에서 우리가 수술해야 할 환자는 대부분 중증이었다. 적절한 시기에 심장수술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한 의사들도 중국 의사들처럼 오칼라로 초청하기 시작했다. 우선 병원 지도자들이 와서 우리 병원의 시스템을 알아야 같은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평양심장센터를 잘 수립할 것 같아 병원장과 병원 간부들을 초청했다. 첫해에 병원 간부 3명과 장기적으로 훈련받을 의사 3명을 초청했다.
중국 의사들과는 저녁식사 후 성경 공부를 했지만 이들과는 다른 일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우리는 민족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며 1년에 두 번씩 평양을 방문한다.
정리=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정수영 (12) 평양서의 첫 수술 성공… 민족 복음화 첫 발을
입력 2015-01-01 0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