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어느 회사죠?”
각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업무 강도 때문에 퇴사를 고민하는 ‘직장인 선배’의 글이 종종 올라온다. 그러면 어김없이 ‘취업준비생 후배’의 이런 물음이 따라붙는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근무 환경도 그냥 포기할 문제는 아니다. ‘까라면 까는’ 군대식 문화, 정시 퇴근은커녕 주말마저 반납하는 삶은 대기업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는다. 만원 지하철에 지친 몸을 구겨 넣는 대한민국 ‘미생(未生)’들에게 ‘일과 삶의 균형 있는 조화’는 아직 꿈일 뿐이다.
그런데 독일 화학업체 바스프의 국내 법인인 한국바스프 미생들은 좀 다르다. 지난 10월부터 근무를 시간 중심에서 성과 중심으로 바꿨다. 개념만 바꿨을 뿐인데 직원들의 삶과 업무가 180도 달라졌다고 한다. ‘완전자율근무제’를 택한 이 회사의 대담한 실험은 어떤 변화를 만들고 있을까.
29일 찾은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건물의 한국바스프 서울사무소. 변화는 겉모습보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직원들은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하지만 눈치 보지 않고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가는 중이었다.
여덟 살과 다섯 살 두 아들을 키우는 ‘워킹맘’ 전성현(38·여) 차장은 지난 10월부터 큰아들 학교의 ‘녹색어머니회’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순번에 따라 오전 8시부터 1시간가량 학교 주변에서 통학로 안전지킴이 역할을 한다. 이후 경기도 성남 집에서 출발해 오전 10시쯤 회사에 도착한다.
아침에 둘째 아이를 봐주러 오는 돌보미가 늦어도 발을 동동 구르지 않는다. 오후에 아이들 챙겨야 할 일이 생기면 아침 6시30분 출근해 일찍 업무를 시작한다. 전 차장은 “이제 아이 학교 행사가 반갑다. 근무시간에 쫓기지 않는 대신 업무 책임감과 집중도는 더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바스프 여직원 138명 중 절반 이상은 전씨 같은 워킹맘이다.
환경안전팀에 근무하는 최명희(28·여)씨는 한 달째 ‘야근’ 중이다.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법 시행을 앞두고 회사가 취급하는 수만종 화학제품의 안전규정을 검토하느라 눈코 뜰 새 없다. 그런데 정작 최씨는 “야근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퇴근이 늦어졌지만 아침은 훨씬 여유롭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서울 신도림에서 오전 7시40분에 만원 지하철을 탔다. 지금은 40분 늦게 나와 지하철에서 앉아서 온다. 김밥 한 줄 먹기도 버거웠지만 이제는 아침을 ‘진수성찬’으로 먹고 나온다.
업무 효율은 높아졌다. 최씨는 “독일 본사에 연락해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쪽은 우리 시간으로 오후 4시쯤 일을 시작한다. 본사에 업무를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 편하다”고 했다. 독일 본사에 아무도 없는 아침에 출근하고 오후 늦게 주요 업무가 시작돼 어쩔 수 없이 야근하던 일상이 바뀐 것이다.
완전자율근무제는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는 탄력근무제에서 한발 더 나아간 개념이다. 업무에 지장이 없다면 몇 시간 일하든 자유다. 상사의 ‘허가’도 필요 없다. 한국바스프 서울사무소 직원 343명이 모두 대상이다.
처음엔 걱정과 반대가 앞섰다고 한다. 영업직원들은 고객 주문 처리와 배송 일정 관리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했다. 난관을 돌파한 건 신우성(57) 대표였다. “혹시 생길지 모를 위험 때문에 시도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득했어요. 문제가 있으면 수정하고 그래도 안 되면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고.”
신 대표는 2003년부터 3년간 독일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독일은 일부 직원을 제외하곤 대부분 정해진 근무 시간이 없다. 대신 무섭도록 일에 몰두하고 업무를 마치면 가족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완전자율근무제는 3개월 시험기간을 거쳐 내년부터 정식 시행된다. ‘강제휴가제’ 도입도 검토 중이다. 신 대표는 “국내 기업 임원인 친구들은 ‘연간 휴가(annual leave)’를 다 쓰면 회사를 ‘leave’(떠나다) 해야 한다고 말한다”며 “40·50대 직원 중에 아예 휴가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되도록 모두 휴가를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실적은 어떨까. 한국바스프 매출액은 2012년 2조523억원에서 지난해 2조2619억원으로 10% 늘었다. 영업이익은 1339억원에서 1368억원으로 증가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기획] 출퇴근 맘대로, 능률은 두배로… 살맛나는 미생들
입력 2014-12-31 0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