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곽효정] 편지할게요

입력 2014-12-31 02:30

연말을 제주에서 보내기로 했다. 옷 한 벌과 카메라 그리고 엽서 꾸러미. 짐은 단출했다. 올해 다친 다리가 다 낫지 않아 올레길을 걷는 것은 무리였다. 거기까지 가서 그럼 무얼 할 것이냐 묻는다면 나는 중요한 두 가지 일을 할 것이라 답하겠다.

한 가지는 ‘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 날마다 가는 일이다. 중학교 때 형에게 카메라를 선물 받아 사진을 찍기 시작했던 김영갑은 제주의 순수한 자연에 매료되어 그곳에서 홀로 살아가며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찍은 필름이 약 30만컷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손이 떨리기 시작하다가 상태가 심각해져 병원을 찾은 2001년, 그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음 해 폐교를 빌려 이 갤러리를 열고 2005년 세상을 떠났다.

두 해 전 겨울에도 제주에 있는 4일 내내 이곳을 찾았다. 어떤 날은 맑았고 어떤 날은 온통 눈이 덮여 있었다. 같은 장소라고 하기에 너무 다른 날씨 덕분에 갈 때마다 다른 풍경을 보았고 새로운 것을 느꼈다.

갤러리를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남태평양에서 온 사람이 있을 만큼 그 출신은 다양했다. 무인 카페의 방명록에는 김영갑의 삶이, 사진이 자신을 위로했다는 고백들이 이어졌다. 이상했다. 사는 동안 고독하고 힘들었을 그를 찾아와 위로 받다니, 바쁜 도시에서 사람들에 둘러싸인 우리가 그에게서 따뜻함을 느끼다니…. 문득 쓸쓸히 말구유에서 난 아기 예수가 떠올랐다. 참 위로는 화려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리라.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묵기로 한 게스트하우스의 엽서함을 이용하는 일이다. 그곳 주인은 손님이 2014년 12월에 엽서를 써넣으면 1년 후 2015년 12월에 보내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나는 지난달부터 지인들에게 1년 후에도 그곳에서 살 것이냐는 이상한 질문을 해가며 주소를 모았다. 몇몇은 아무 질문 없이 주소를 주기도 했고, 몇몇은 기다릴게 하기도 했고, 또 몇몇은 1년 후 주소는 왜 묻느냐며 궁금해했다. 그러면 나는 숙성된 손편지를 보내려면 1년이 필요하다고 했다. 주소를 물으면서 그리운 친구들에게 안부를 물었고 편지할 곳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곽효정(매거진 '오늘'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