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인가 보다. 가족끼리 TV를 보다 “완전 좋아요” “너무 예뻐요”처럼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을 들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급기야 그런 말을 무심코 내뱉는 출연자와 그걸 그대로 내보내는 방송사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질 때면 “아빤 뭘 그리 예민하냐”고 힐난하는 대학생 딸과 부딪히기 일쑤다. ‘너무’는 원래 용언을 부정적으로 한정하는 부사다. “너무 어렵다” “너무 늦다”라는 말처럼 어떤 한계를 지나치는 부정적인 표현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예쁘다”의 극단적인 표현을 위해 문법에 맞지 않는 ‘너무’라는 부사를 너무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게 작금의 언어현실이다. 심지어 연예인을 향해 “너무 팬이에요”라는 표현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또 하나 “완전 좋아요”처럼 뭐든 극단으로 치닫는 언어습관은 “기어이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무한 경쟁에 내던져진 치열한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처럼 ‘극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타인에 대한 비난에도 품격을
최근 대한항공 조현아 사태에 대응하는 국민들의 자세도 이 같은 시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그날 ‘땅콩 회항’ 사건 이후 우리 모두는 그를 잘기잘기 씹어서 저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재벌 그 자체가 평소 부정적인 이미지인 데다 재벌가 딸의 철없는 행동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일부 매체는 남 얘기 좋아하는 이야기꾼들을 내세워 몇날 며칠을 비아냥거렸다. 팩트를 주장하기보다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줄기차게 내보냈다. 그만큼 우리는 집요했고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할 때까지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는 타인에 대한 비난에도 갖춰야 할 최소한의 품격마저 잃어버렸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도 극단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슬픈 사회가 돼 버렸다.
이 같은 극단주의적 경향은 우리 사회의 치열한 경쟁이 낳은 산물이란 점에서 아픔이 있다. 경쟁에 노출돼 있는 사람은 승리를 위해 극단을 서슴지 않는다. 경쟁의 속성상 패자로 내몰리는 절대다수는 타인의 실패를 통해서라도 보상을 받고 싶어 한다. 그 실패담의 주인공이 승자거나 우리 사회 갑의 지위에 있는 경우면 쾌감이 더욱 커진다.
심리학 용어인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는 ‘고통(Schaden)’과 ‘환희(Freude)’의 합성어인데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에서 느끼는 기쁨을 말한다. 실험에 따르면 인간이 샤덴프로이데를 느낄 때 뇌에서 기쁨과 보상의 영역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질투가 낳은 인간의 잔혹한 본능의 한 단면이라고 한다.
극단주의 최고 처방은 사랑과 용서
인터넷 시대가 극단주의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극단주의자를 한데 모아 이들의 사고를 더욱 극단화시킨다는 것이다. 캐스 R 선스타인 하버드대 교수는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라는 저서에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자기 생각에 동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 더욱 극단적으로 움직인다고 설명한다. 소수의 믿음이 다수에게로 전이돼 극단주의를 부추기는 원인을 ‘사회적 폭포현상(social cascades)’이라고 풀이했다. 물론 극단적인 사고와 행동이 항상 나쁜 것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산업화 시대 우리의 압축성장은 근대화 외길을 위해 극단적으로 달려온 우리 국민의 위대한 업적이랄 수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한 해가 저물고 곧 2015년 새해가 밝아온다. 양의 해 새해에는 온 국민이 극단주의를 배격하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는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극단주의 시대를 극복할 최고의 처방전은 사랑과 용서다. 용서는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예수는 용서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며 가없는 사랑을 설파했다.
서완석 문화체육부 국장기자 wssuh@kmib.co.kr
[돋을새김-서완석] 극단적인, 너무나 극단적인
입력 2014-12-30 0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