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월급쟁이지만 대한항공의 ‘땅콩 리턴’ 소동이 내 일 같지는 않았다. 일개 회사원이 오너에게 꾸지람 듣는 ‘영광’을 언제 누려보겠나. 사장이 내 존재를 알긴 할까, 다수는 그렇게 믿고 산다. 현실에서 부사장이 던진 파일에 맞는 건 면전에서 사장님 칭찬 들을 확률만큼 희박하다. 오너의 칭찬과 모욕은 얼굴 볼 기회라도 있는 임원 몫이다. 우리에겐 부서장 상대할 맷집 정도면 충분하다.
그래도 ‘땅콩 부사장’ 사건이 알려준 게 있긴 하다. 모멸감의 생산·유통 메커니즘이랄까. 모욕, 분노, 수치심이 조직의 어디서 만들어져 어떻게 퍼져 나가는지 짐작하게 됐다. 출발은 아마 땅콩 부사장 같은 사람이었을 거다. 조직 최상층부에서 시작된 모욕은 위계의 사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동안 야무지게 발효·증폭된다. 전무에서 부장으로, 부장에서 차장·과장으로, 다시 대리로, 신입으로, 계약직으로. 한줌 권한을 가진 이에게서 그 한줌이 부족한 이에게로. 1년 선배에게서 1년 후배에게로. 권력의 크기에 따라 하수구에 물 빠지듯 모멸감은 조직의 혈관을 따라 부글대며 흘러간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을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세상의 직장인이 왜 드라마 ‘미생’을 보며 현실 속 직급 대신 계약직 장그래에게 감정이입했을까(땅콩 회항 정도의 꾸지람을 처벌하자면 밤잠 설칠 직장 상사가 부지기수인데도 말이다). 대신 돈 벌어오라 시킬 자본이 없는 이들. 그래서 노동으로 생계를 잇는 대다수가 어째서 월급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직급의 높낮이와 무관하게 ‘밥벌이는 서러운 거야’ 모멸감에 몸을 떨며 장그래와 안영이에게 열광했을까. 우리는 어쩌다 모두 ‘을의 마음’으로 ‘갑질’도 해가며 살게 된 걸까.
사회학자 김찬호는 모멸감을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이라고 했지만 이게 한국 사회만의 특징적 시대감정인지, 자본주의 시대의 보편적 정서인지는 모르겠다. 경험에 비춰 한국에서 유난한 것 같긴 하다. 어찌 보자면 모멸감은 한국의 조직이 움직이는 운영 원리이기도 하다. ‘모멸감을 동력으로 한 리더십’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도제 시스템이 여전한 우리 조직에서 신입이 배우는 첫 계명은 “나는 무능하다”이다. 무능해서 혼자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력이 존중받을 이유는 없다. “당신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모욕의 융단폭격은 그가 가장 취약하고 연약한 마음일 때 이뤄진다. 수치심은 내면화된다.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개인이 숙련된 상사의 모욕에 대항할 수는 없다.
입사 초 선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거야, 회사에선. 기분 더러워? 네 월급 팔할은 더러운 기분 참으라고 주는 거야.” 그렇구나, 모욕값이구나, 고개를 주억거렸더랬다. 심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니다. 콜센터 직원 같은 감정 노동자에게는 더 적나라한 표현이 동원된다. “너희는 쓰레기통이야. 그 역할 하라고 월급 주는 거야.”(‘모멸감’ 중)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 회사 먼저 떠난 선배는 ‘미생’에서 이렇게 말했다. 맞는 말이다. 세상 을들은 밀려나면 죽는다는 위기의식으로 버틴다. 장그래가 ‘우리’란 말에 감읍했던 이유도 ‘우리’ 밖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기 때문이다.
“2년 미생(未生)에서 4년 미생(未生)으로? 장하다, 대한민국 공무원!” “장그래는 정규직 되고 싶은 거 아니었나? 나는 다른 ‘미생’을 봤나봐.” “4년 비정규직 국회의원과 계약기간을 맞춰주는구나.”
35세 이상 비정규직 계약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비정규직 종합대책’ 일부가 보도되면서 공분을 샀다. 한 언론은 이걸 ‘장그래법’이라고 불러 기름을 부었다. 정부 기준 비정규직이 607만명(노동계 추산 852만명), 임금은 정규직의 65%에 불과하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는데 계약기간을 늘려줄 테니 더 참으란다. 기업 걱정하며 생색이라도 안 냈으면 분노가 덜했을까. “결정된 게 없다”는 고용노동부 변명이라도 믿고 싶어진다.
이영미 종합편집부 차장 ymlee@kmib.co.kr
[뉴스룸에서-이영미] 장그래법이라니
입력 2014-12-29 02:43 수정 2014-12-29 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