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성(75)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총장은 요즘 청소년을 '삼(3)요 세대'라고 규정했다. 어떤 대화든 '아니요' '몰라요' '그냥요'라며 말문을 닫는 특징을 말한 것이다.
"어떤 아버지가 아이에게 '요즘 공부 잘하고 있어?'라고 물어요. 그러면 아이는 '아니요'라고 답하죠. 다시 '무슨 대답이 그래?'라고 물으면 '그냥요', '그럼 나중에 뭐가 될래?' 하면 '몰라요'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이 총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대학교수로 한평생 상담인력을 양성해 온 심리·상담 전문가의 뼈 있는 농담이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상담이 중요해진 시대라고 했다. 극한 경쟁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으려 발버둥치다 보니 인간 본성을 잃어버리기 쉽고, 특히 청소년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의 자산은 잠재력인데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공부만 하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어른이 돼 버린다고 진단했다.
이 총장은 "요즘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다. 어른들은 자꾸 뭔가 집어넣어 주려고만 한다. 아이들이 간직하고 있는 자아를 끄집어내 주는 게 어른의 임무이고 상담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효령로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에서 그를 만났다. 다리를 절고 있었다. 고령에 이스라엘과 요르단 성지순례와 미국 출장까지 다녀온 후유증이라고 한다. 그래도 "열정은 15세"라며 웃었다.
-우리 사회에서 상담의 영역이 커지고 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 하다 보니 사회 전체가 황폐화됐다.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곳이 됐다. 도태된 사람을 보듬는 것도 상담의 역할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꼭 필요한 게 상담이다. 본인에게 맞는 삶을 살려면 자기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상담 풍토는 지나치게 기능적이다. 우울증, 불안 등을 완화해주는 상담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게 상담의 본질은 아니다. 삶 속에서 자기 본질을 찾도록 돕는 게 상담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공부 잘하게 하는 상담같이 기능화돼 있다. 아이가 자아를 찾는다면 공부 잘하는 상담은 별로 필요 없을 것이다. 본질에 접근하는 상담이 필요하다."
-상담에 인문학적 배경을 강조하는데.
"인간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힘이 상담자에게는 중요하다. 그러려면 상담인력은 인문학적 성찰이 충분히 돼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학교를 열 때 인문학을 강조했다. 의사가 눈에 보이는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이고, 법관이 눈에 보이는 사건을 심판하는 역할이라면 상담은 보이지 않는 인간사에 관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갈등을 완화시키고 자기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일이 상담자의 임무다. 인간이라는 게 정말 복잡하다. 예측불허다. 또한 무궁한 가능성이 있다. 본인 그리고 이를 둘러싼 환경, 그 관계 속에서 가능성을 찾아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매우 고차원적인 일이다."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웠다.
"준비가 안 된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건 마약을 주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남편이 한평생 건축업을 했고, 저는 상담을 하고 상담인력을 양성했다. (남편과) 죽기 전에 뭔가 사회에 도움되는 일을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남편이 제게 준 선물이나 다름없다. 늘그막에 놀이터를 만들어준 것이랄까(웃음). 이화여대 교수로 있으면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여성·청소년 상담과 관련된 일이 많았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청소년상담원장으로 있을 때 아이들과 많이 만났다. 우리 공교육이 부족하다. 가정교육도 부족하다. 가정과 학교가 부족하면 사회가 나서야 한다. 남편이 남겨준 학교에서 내가 일생동안 연구해온 상담학을 발전시키고 싶다."
-상담 관련 학교·기관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우리 학교는 실습을 강조한다. 제가 오랜 기간 대학에 있었지만 학생들 실습 여건에 문제가 많다. 중·고교, 사회기관, 군대, 청소년기관 등 다양하게 실습을 시킨다. 실습 나가는 학생은 담당교수가 철저히 감독하며 성과를 내도록 한다. 교수였던 분, 변호사, 대기업 인사부장, 개인 상담센터 운영자 등이 우리 학생으로 있다. 상담은 결국 인간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총장과 교수 그리고 학생까지 인간관계를 끈끈하게 하도록 노력한다. 제가 학생들에게 한 달에 한두 번씩 '지음(知音) 서신'이란 편지를 보낸다(지음은 이 총장의 호다). 또 한 달에 한 번씩 '데크 파티'를 열어 학생들과 소통한다."
-내년에 청소년 상담캠프와 기독교 상담전문가 과정을 추진 중인데.
"우리가 만든 '십오통활(十五通活)'이라는 상담 브랜드가 있다. 15라는 숫자는 나이로 따지면 중2에 해당하고 사춘기의 상징이다. 인생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고뇌도 많고 의욕도 많은 때다. 좌절·용기·모험·저돌성 등이 이 시기 청소년의 특성이다. 한마디로 카오스다. 창의성과 무질서를 동시에 갖고 있다. 어떻게 이끌어주느냐에 따라 부정적으로 발현될 수도 있고 긍정적으로 되기도 하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고 공부로만 내몰려 공부만 잘하는 맹꽁이가 되기 일쑤다. 십오통활은 한마디로 자아를 향해 떠나는 여행 프로그램이다. 상담과 소통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진정한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일보가 꾸준하게 써온 청소년 관련 기획기사와도 맥이 통한다."
-위기학생 문제가 심각하다.
"아이들 대화를 들어보면 태반이 욕설이다. 불쾌할 때도 좋을 때도 어김없이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내뱉는다. 어른들은 '저 아이들 왜 저래' 하고 혀를 차지만 이유가 있다. 욕설은 아이들 내면에 쌓인 욕구불만을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억눌려 있기도 하지만 세상에 자극이 너무 많다. 매체가 대표적일 것이다.
부모들이 '넌 아무 생각 말고 공부만 해'라고 하는데,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공부를 하는가. 청소년을 바꾸려면 여성이 바뀌어야 한다. 아이들 대부분은 여성의 손에서 큰다. 청소년 상담과 여성 상담은 그래서 같이 가야 한다. 아이들을 억압하는 것 특히 청소년 스스로 생명을 끊는 극단적인 상황을 만드는 건 정말 어른들의 크나큰 잘못이다."
이혜성 총장은 누구
이혜성 총장은 평생 대학에서 상담학을 가르친 심리학계 원로다. 청소년·여성 상담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1939년생인 이 총장은 이화여자중고교,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거쳐 미국에서 교육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서울여대 교육심리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기 시작했고,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로 23년 동안 재직했다. 한국상담심리학회장, 한국청소년상담원 원장, 한국카운슬러협회 회장, 한국간행물윤리위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남편인 고(故) 오병태 ㈜동남주택산업 회장(2012년 작고)과 평생 모은 재산으로 2009년 서울 서초구 효령로에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를 설립했다. 이 총장은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사람을 회복하고 살리는 상담 인력을 배출한다는 철학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
“생각 말고 공부나 하라? 생각 없이 무슨 공부를 하나”
입력 2014-12-29 0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