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서울 인왕산 밑에서 태어난 화가 정선과 시인 이병연. 죽마고우인 두 사람은 표현 수단은 달라도 추구하는 게 같았다. 직접 본 우리 산하를 그리고 시로 읊자는 이른바 ‘진경산수’ ‘진경시’의 대가였다. 정선은 나이 64세 때 양천(현재 서울 강서구 등촌동 일대)의 현감으로 가게 됐다. 이별을 못내 아쉬워하던 둘은 서로 시와 그림을 나누자고 한다. 정선은 한강 주변 경치 35점을 그려 선사했고 이를 엮은 게 ‘경교명승첩’이다.
정선이 서울 아차산 일대 광진나루를 그린 ‘광진’, 선유도 주변을 그린 ‘양화환도’ 등 경교명승첩 속 우정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간송문화전’ 3부 전시인 ‘진경산수-우리 강산, 우리 그림’전에서다. 돛단배가 떠다니는 광진 나루 일대 풍경은 지금의 시점에선 상상이 안갈 정도로 호젓하다.
진경산수화는 임진왜란 후 명나라가 망하면서 생긴 소(小)중화 사상에서 태동했다. 관념 속 산수가 아니라 ‘진짜 경치’를 그리자는 국토애의 발현이다. 정선에 와서야 기법을 창안하고 완성했다. 정선이 생활 무대였던 인왕산의 청풍계(淸風溪) 뿐 아니라 금강산, 도산서원 등 국토 곳곳을 누비며 사생한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사대부 화가들에 의해 시작된 진경산수는 정조시대로 가면서 김홍도, 이인문, 김득신 등 화원 화가들에 의해 계승되며 만개한다.
특히 김홍도는 왕명을 받들어 강원도 영동 9경의 명승을 사생해 돌아오기도 한다. 같은 풍경을 그렸어도 심상을 담아 붓을 좍좍 내리 긋던 사대부 화가 정선과 달리 화원 화가 김홍도의 진경산수는 충실하고 꼼꼼한 묘사가 특징이다.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던 화원 화가 이인문이 그린 해금강 ‘총석정’은 당시 유입된 서양화 기법이 반영돼 흥미롭다. 전통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수평선을 확실하게 표시한 것, 서양식 투시의 기법이 반영된 것 등이 그렇다. 수채화 같은 느낌을 준다.
19세기로 가면서 추사 김정희로 대표되는, 청나라를 배우자는 북학파가 득세하면서 진경산수화는 부정 당한다. 그 시기 진경산수화가 어떻게 잔영을 끌어가는지는 이방운, 윤제홍 등의 그림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진경산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다시 살아난다. 조석진과 안중식, 그의 제자들인 김은호, 노수현에 의해 현대까지 맥을 이어왔다. 진경산수화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전시다. 내년 5월 10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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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12-29 0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