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남자들의 초상

입력 2014-12-29 02:51
송호준 ‘안녕하십니까?’ 관객이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영상 속의 남성은 물론 여성도 과도하게 90도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남성다움이 왜곡되어 있음을 꼬집는 작품이다.아트선재센터 제공
아크람 자타리의 ‘게바트 광고사진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두 소년’. 공공장소에서 신체접촉이 터부시된 레바논 남성들이 사진관이라는 공간에서 광고 인형을 통해 애정표현을 하는 모습을 담았다.
“영화표는 내가 샀다, 팝콘은 니가 사라.”

2009년 KBS 개그콘서트 ‘남보원(남성인권보장위원회)’ 코너는 ‘쪼그라든’ 한국 남성의 위상을 입심 좋은 개그맨 3명이 풀어놓는다. 마지막에는 이런 ‘찌질한’ 구호로 끝냈다. 남성 역시 가부장 문화의 피해자임을 외치는 호소는 남녀 모두의 공감을 사며 전국 안방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고개 숙인 남성’이란 주제는 일찌감치 대중문화에서 시대 정서임을 확인했던 웃음코드다. 묵은 주제가 마침내 예술의 옷을 입고 미술전시장에 등장했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내달 25일까지 열리는 ‘그만의 방: 한국과 중동의 남성성’전이다.

영상 속에 치렁치렁 긴 머리 여대생이 얌전히 서 있다. 관람객이 다가오자 (센서에 의해) 갑자기 ‘90도 인사’를 하며 ‘안·녕·하·십·니·까!’를 외친다. 1970, 80년대 ‘조폭’이나 쓰던 인사법이다. 이제는 아이돌그룹도 차용할 정도로, 조폭문화가 상징하는 가부장질서가 희화화되고 있음을 작가 송호준은 꼬집는다.

가족사진으로 모자이크 벽화를 만든 이동용의 작품도 재미있다. 제목은 ‘아버지’이지만 정작 가족사진에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가 찍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위트 있게 비틀었다.

세대별로 다른 ‘남자들의 방’도 흥미 있다. 1923년생 경찰공무원의 방에는 상장, 임명장, 훈장이 즐비하다. 한국전쟁과 5·16 등 현대사와 궤적을 같이 했던 그의 삶을 증거한다고 생각해서다. 베이버부머 세대는 직업과 취미 사이에서, 요즘의 고교생은 취미를 통해 정체성을 찾는다는 걸 그들 방에 놓인 다이어리, 책, 옷 등을 통해 보여준다.

중동 남자들은 어떨까.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레바논 대표 작가였던 아크람 자타리는 70년대 철거된 동네 사진관에서 수집한 사진을 작품으로 내놓았다. 남자들이 사진관에 설치된 비키니 차림의 서구 미인 인형을 두고 포즈를 취했다. 소년, 성인 할 것 없이 인형을 끌어안거나 키스를 하는 등 애정표현을 했다. 공공장소에선 남녀의 신체 접촉이 금기시된 나라에서 남자들이 행하는 일탈이다.

이스라엘 작가 로미 아키튜브의 ‘춤’은 낙원에서 춤추는 여성 5명으로 구성된 앙리 마티스의 동명 유화를 설치작품으로 패러디했다. 여기선 남성 5명이 나체로 춤추는데, 얇은 합판을 겹쳐 올려 커팅하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남성성이야말로 문화적으로 축적된 결과물임을 말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좌절을 표현하듯, 반이 잘린 몸에서는 끊임없이 꿀이 흘러내린다.

경비실의 경험은 한국과 중동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한국의 경비실이 은퇴한 남자들의 마지막 직장인 것과 달리, 이스라엘에서는 갓 군복무를 마친 미혼 남성들이 거쳐 가는 공간이다. 이스라엘 작가 자히 하크몬이 내부를 한국의 경비실 모습으로 채운 경비초소를 만들어 관객을 초대한다. 사람 하나 겨우 앉을 수 있는, 안전하면서도 안전하지 않은 ‘남자의 방’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한국 작가와 중동 작가가 ‘우는 남자들’을 주제로 한 작품을 동시에 내놓은 것도 눈길을 끈다.

전시를 기획한 이혜원 대진대 교수는 28일 “10여 년간 한국을 떠나 있다가 2000년대 초반 돌아와 보니, IMF를 겪으며 남자들이 자신을 불쌍하게, 가부장 문화의 피해자로 바라보고 있어 무척 놀랐다”면서 “한국보다 더 가부장적인 중동 지역도 함께 엮어 가부장문화 속의 남성성을 돌아보는 기획을 구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서구인들이 성(性)으로서 남성을 바라보는데 비해 한국과 중동은 사회적 역할 속에서의 남성에 더 관심을 갖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