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우리를 행복하게 한 아홉가지 이야기] 볼리비아서 학교 세우고 10년째 복음 씨앗, 고광문 선교사

입력 2014-12-27 02:35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웃을 위해 묵묵히 헌신해 온 분들께 "올 한해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낯선 나라에 와서 삶의 터전을 일구는 외국인 근로자, 엄마 리더십으로 청소년 선도에 앞장선 여경,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위로하는 목사, 슬픔에 빠진 안산시민을 돕는 '재래시장 장보기'를 진행한 목사, 볼리비아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선교사, 자살예방상담원, 개척교회 목사를 돕는 전직 의학전문기자, 꿈을 실현한 이 시대 '미생', 신앙서적 후가공을 고집하는 인쇄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소개한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왜 하필 볼리비아입니까? 그곳엔 안 가겠습니다."

해발 4000m가 넘는 남미 고산지대에서 10년째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고광문(55·월드휴먼브리지 볼리비아지부) 선교사는 2004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단호히 거절했다.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볼리비아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때 고 선교사가 둘러댄 개인적인 고사 이유는 수두룩했다. 먼저 두 자녀의 교육 문제였다. 예민한 중·고등학생 시절을 지나고 있었다. 자식들의 대학 진학과 펼쳐질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부모를 따라 볼리비아에 살게 될 때 감당해야 할 불이익들이 걱정됐다. 또 사랑하는 아내의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어디를 나가더라도 보약이라도 좀 먹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 불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문제는 고 선교사 자신에게 있었다. 한마디로 이 나라만큼은 가기 싫었다. 그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찬송은 했지만 정작 부르심엔 '아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연약함을 아셨던지 하나님은 고 선교사에게 극약 처방을 내렸다. 어느 날 밤 너무나 선명한 꿈을 꾸게 했고 약 10개월 후 그 현장의 모습을 볼리비아에서 사역하셨던 선교사님이 보여준 사진을 통해서 깨닫게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폭력 장면 등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며 등골이 오싹하고 얼마나 소름 끼쳤는지 모릅니다. 돌이켜 보면 믿음이 연약한 저를 아셨기에 주님이 더욱 분명한 부르심을 위해 주신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2005년 6월 볼리비아에 온 고 선교사는 3년 전,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남쪽으로 450㎞ 떨어진 시골마을 씨빼 씨빼 지역에 월드휴먼브리지 볼리비아 직업기술학교를 세웠다. 매년 100명 가까운 청소년들에게 영어와 한국어, 컴퓨터 등을 가르쳤다. 지난 3월, 졸업식에 참석한 75명 졸업생들의 얼굴에서 볼 수 있었던 희망찬 미소는 고 선교사에게 큰 선물이었다. 왜냐하면 10년 동안 현지 사역에서 경험한 모든 상처와 고통, 어려움의 짐을 깨끗이 씻어주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졸업식장에서 자신들이 1년 동안 흘린 땀방울의 소중함에 대해 감동을 나눴다. "나와 같이 어둠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희망과 꿈과 도움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재봉반을 졸업한 로헬리아(32)의 고백은 많은 이들의 코끝을 찡하게 울렸다. 그녀는 술 취한 남편에게 매일 얻어맞고 결국 버림을 받았다. 비참한 자신의 삶과 모습 때문에 세 자녀를 버리고 인생을 끝내려고 했었다. 그러던 중 고 선교사를 만나 재봉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들에게 조롱거리가 돼 고개도 못 들고 다녔지만 지금은 일감도 들어와 생활에 활력을 찾고 있다. 더욱 귀한 것은 이 과정을 통해 잃었던 신앙을 되찾아 주일 예배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는 것이다.

제빵반을 졸업한 블랑카(38)는 "돈이 없어 자녀들의 생일잔치를 한번도 해준 적 없었는데 케이크 만드는 법을 배워 아이들 생일을 축하해줄 수 있어 기뻤다"고 자랑해 박수를 받았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40세에 신학도가 된 고 선교사는 지난해 7월엔 교회 사역을 현지인 목회자와 미국에서 온 평신도 한인 선교사님께 이양하고 현재는 현지인 리더를 세우는 사역을 독립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고 선교사는 바로 자신 안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왜 볼리비아냐고 대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성품을 닮지 못한 부분이 있다거나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시작돼야 할 선교지가 아닐까요."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