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성] ‘모름’을 통해 생명·평화의 길 모색한다

입력 2014-12-27 02:49
‘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은 생명 경시의 시대에 ‘생명신학’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책은 군사문화에 물든 이 땅에서 반전(反戰)의 의미를 되새긴다. 사진은 두 소녀가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쌍둥이 시계를 안고 있는 형상을 표현한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의 ‘평화의 시계탑’. 국민일보DB
“모름을 지킬 때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된다.” 서구의 인식론과 신학 방법론을 반성하고 우리 신학의 길을 트는 역작이다. ‘모름지기’는 우리말 부사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사리를 따져 보건대 마땅히. 또는 반드시’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사상가 다석 유영모(1890∼1981) 선생은 이를 ‘모름직이’(모름을 지킴)로 풀었다.

생명과 물질의 세계에는 이성이나 물질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 밖에서 규명할 수 없는 모름의 차원이 남는다. 이 책은 죽고 죽이고 죽임 당하는 시대, ‘생명’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모두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 ‘생명신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한국 근현대사 속의 민중의 삶과 의미를 드러낸다. 이어 2부 ‘평화를 이룩하는 신학’은 오늘날의 문명에 절실히 요구되는 평화를 생각한다. 먼저 한국 문화와 민주화 운동의 평화적 전통을 밝힌다. 또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을 이끈 김재준, 함석헌, 문익환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군사 문화에 물든 이 땅에서 반전(反戰)의 의미를 묻는다. 이어 동아시아의 평화로 가는 길을 우치무라 간조, 함석헌, 김교신의 사상에서 찾는다.

3부 ‘살림의 신학과 실천’은 어떻게 생명의 삶을 살 것인지 구체적인 실천을 다룬다. 서구 문명의 인식론을 근본에서 비판하고 우리의 인식론을 제안하며, 성경 읽기에서 생명 사건을 찾고, 성경의 증언대로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 논한다. 마지막으로 더불어 살아갈 존재로서 장애인을 어떻게 맞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저자가 제시하는 길은 ‘모름의 인식론’이다. 이는 서구의 인식론과 신학으로는 성경의 생명 사건과 우리의 삶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오늘 내가 있는 자리에서 생명 사건을 일으킬 수 없다는 반성이 깔려 있다. ‘모름의 인식론’은 인식 대상이 아니라 인식 주체가 깨지는 인식론이며, 인식 대상을 신뢰하고 인식 대상과 하나가 되는 인식론이다. 생명의 관계가 아닌 거래와 사업적 관계가 주를 이루어 생명을 생명으로 만나지 못하는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필요한 인식론이자 신학이다.

책은 또 한민족의 시원(始原)과 뿌리를 보여준다. 우리의 생명 체험과 생명 이해가 어떤 것인지 밝힌다. 한민족은 수천, 수만년 전부터 해 뜨는 동쪽, 밝고 따뜻한 나라를 찾아 한반도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책은 서구의 인식론, 생명에게 다가가는 근본 태도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을 깨뜨리고 파괴함으로써 대상을 파악하려는 반(反)생명적 인식론으로는 깊은 삶의 세계,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을 살리는 분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은 우리 속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이자 사랑을 낳는 영이라고 설명한다. ‘셋과 하나’의 묘합을 말하는 삼일(三一) 사상은 기독교가 이 땅에 전파되기 이전에 이미 한국인의 심성 깊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서구 문명의 위기를 넘어 새로운 문명의 미래를 열어갈 씨앗이 이미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이 책은 한민족의 생명 체험을 통해 밝혀 놓는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