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우리를 행복하게 한 아홉가지 이야기] 6년간 고난 현장서 221차례 '촛불 기도회', 최헌국 목사

입력 2014-12-27 02:26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웃을 위해 묵묵히 헌신해 온 분들께 “올 한해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낯선 나라에 와서 삶의 터전을 일구는 외국인 근로자, 엄마 리더십으로 청소년 선도에 앞장선 여경,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위로하는 목사, 슬픔에 빠진 안산시민을 돕는 ‘재래시장 장보기’를 진행한 목사, 볼리비아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선교사, 자살예방상담원, 개척교회 목사를 돕는 전직 의학전문기자, 꿈을 실현한 이 시대 ‘미생’, 신앙서적 후가공을 고집하는 인쇄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소개한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런 교회가 있네∼”.

촛불교회 최헌국(51) 목사가 지난 6년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촛불교회는 거리의 교회다. 고난의 현장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2009년 2월 26일 용산참사 현장을 시작으로 밀양 송전탑, 제주 강정마을, 한진중공업·쌍용자동차·재능교육 노동자, 철도 파업, 그리고 세월호 가족들까지.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지금까지 221회의 ‘촛불기도회’를 개최했다.

최 목사는 울부짖는 현장 속에서 나무 십자가를 세우고 촛불을 켰다. 구호를 외칠 때는 제지하던 경찰이 예배드릴 땐 물러났다. 교회를 욕하던 사람들도 촛불교회의 장중한 기도회에 참여하면서 생각을 바꿨다. “그래, 이게 기독교지” 했다.

지난 24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 ‘세월호 천막’에서 만난 최 목사는 오전부터 세월호 유가족을 챙기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차 하실래요? 날씨가 풀렸네요.” 천막에는 유가족들이 순번을 정해놓고 매일 자리를 지켰다.

최 목사는 이날 밤부터 진행되는 성탄전야 촛불기도회를 준비했다. “4월 16일 이후 희생자들에게 성탄은 없습니다. 기도회에서는 희생자를 기리면서 별이 된 아이들과 성탄을 맞이하고자 합니다.”

그는 6년간 다녔던 현장 하나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기독교의 대사회적 역할은 빛과 소금입니다.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소금과 빛입니다. 보수냐 진보냐를 떠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지난 6년간 100일 이상의 단식도 참여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9일을 단식했고 쌍용차 해고자를 위해서는 13일을, 용산참사 가족을 위해서는 23일을 했다. 그러다 병을 얻었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천막도 없이 한겨울 바람을 맞고 단식을 하다가 당뇨병에 걸렸다. 2년 전 봄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분향소가 강제 철거당할 때 단식한 뒤부터는 혈당 수치가 160∼170으로 치솟아 의사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촛불교회의 기도회는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이란 이름으로 시작됐다. 지난해 초부터는 아예 ‘촛불교회’란 이름을 내걸고 시작했다. 그는 “촛불교회는 성경적 교회론에 입각한 교회를 지향한다”며 “운영위원회를 통해 최종 의결하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등록교인도 150여명, 평균 기도회 참석은 30∼40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최 목사도 담임이 아니라 담당목사로 불렀다. 기도회는 70년대 민주화운동에 기여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목회기도회’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매주 목요일 저녁 7시30분에 시작한다.

대전 침례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최 목사는 1989년부터 96년까지 경기도 안양에서 교회를 개척해 목회를 했다. 이후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목정평)와 함께 지역사회운동에 참여했고, 예수살기운동 등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운동 속에 기독교 신앙을 접목하는 데 힘써왔다.

글=신상목 기자·사진=강민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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