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겨울에 그것도 새벽에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이 사실은 예수 탄생의 핵심이다. 생각해보면 지극히 바람직하지 않은 환경이다. 그 거룩한 분의 탄생과 관련해 왜 그렇게 잔인하게 가장 나쁜 환경만을 골랐을까? 그것을 해석하는 일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들의 몫이다.
겨울 새벽이란 견디기 어려운 혹한으로 봐야 한다. 마구간이란 인간 이하의 잠자리다. 왜 인류를 구하시는 분의 탄생을 그렇게 내몰았을까? 그것이 인간이 해석해야 할 기적과 신비의 주체다. 올해도 다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참 적절한 시기에 말이다. 사람들은 불평이 많고, 가진 것보다는 안 가진 것에 대해 신경질 부리고, 정치는 심란하고, 아버지는 힘이 약해지고, 아들은 돈벌이가 불안하고, 약자는 입을 닫고, 강자는 무례를 무심히 저지르는 이런 혹한의 겨울에 말이다. 사람들의 문화의식은 먹거리에 밀려 희미해지고 나눔의 온도는 하강하는 이런 계절에 예수님의 탄생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막강한 교훈을 준다. 대학시절 소설의 내용이 잘 안 보인다고 했을 때, ‘북간도’를 쓰신 안수길 선생님께서 한 “스스로 낮아지면 보인다”라는 말은 잊을 수가 없다.
낮아진다는 것은 눈을 하나 더 뜬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잘살아 보려고 헛된 높이뛰기를 하는 동안 우리는 거칠어지고 공허만 안고 있다. 왜 예수님이 추운 겨울 새벽 남루한 곳에서 태어나셨는지 생각하는 사이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낮추어 냉기 속의 거룩한 신비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인가? 어쩌면 우리가 계산하는 평균 이하의 남루한 곳, 결코 가서는 안 되는 노숙의 냉기를 바라보는 타인에게 주는 관심이야말로 오직 한 분이신 주님 탄생 의미를 이해하리라. 그 남루는 우리의 발이 닿아서는 안 되는 극한의 섬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입술을 대는 사랑으로 바라보는 우리와 연계된 삶의 연속이라는 것을 아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남루한 탄생을 반복하시는 것 아닐까?
나무 아래 무수히 떨어져 있는 가랑잎보다 많이 듣는 사랑은 너무 경직되어 있는 듯하다. 부드러운 피처럼 몸에 스미는 사랑의 전환이 성탄에 이루어지기를.
신달자(시인)
[살며 사랑하며-신달자] 탄생의 의미
입력 2014-12-26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