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에 걸쳐 대하소설 ‘토지’를 완간했던 스케일이 큰 작가 고(故) 박경리 선생이 달콤 쌉싸름한 연애소설을 썼다는 건 의외다. 34세 때인 1960년 대구일보에 4개월여 연재했던 ‘은하’다. 69년 집필에 들어갔던 ‘토지’보다 9년 전에 쓴 게 출판사의 발굴 노력으로 처음 단행본으로 나왔다.
50년대를 배경으로 여대생 최인희와 그의 친구 김은옥을 두 축으로 해 상반된 결혼관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끌고 간다. 선 굵은 작가의 글치고는 통속 연애소설이라 그런지 초반부에 신파의 냄새가 난다는 것도 의외다. 지성인인 여대생임에도 불구하고 인희가 첫 사랑 남자가 유학을 가 결혼하자 자포자기한 심정에서 사업이 망한 아버지 때문에 팔려가듯 부자 집의 재취로 들어가는 게 그렇다. 은옥은 자신을 좋아하는 이정식이 탈영하자 그와 함께 동거해버린다.
박경리 선생이 편드는 삶은 세상이 뭐라거나 말거나 자신의 사랑을 추구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은옥이다. 은옥은 체포돼 군대로 끌려갔다 결국 폐병 때문에 제대하는 무능력한 남편을 사랑의 힘으로 책임진다. 인희는 첫 사랑 남자의 결혼 소식을 전해주며 자신에게 연민의 감정을 보내던 대학 강사 강진호에게 묘하게 끌렸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거부하고 악질 사업가와 결혼한 이후 점점 수렁으로 빠져드는데….
은옥은 근대와 전근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희에게 말한다. “언제까지 낡아빠진 소리만 하고 있어. 감정은 자유야. 좋으면 좋은대루 표시해야지 왜 억젤 하니? (중략) 하긴 나도 인생의 실패자지. 그러나 후회를 하지는 않아. 유감은 없어. 최선을 다했으니까.”
인희는 결국 수렁에서 뛰쳐나오고 자신에게 순애보 같은 사랑을 보내던 강진호를 찾아간다. 악마 같은 전 남편의 마수가 뻗쳐오는 등 연재소설답게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결론은 해피엔딩.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처럼 숙명론적인 여성관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강인한 여성에게 박수를 보낸다는 점에서 ‘토지’의 최 참판 댁 손녀 최서희를 통해 강인한 여성상을 그려냈던 박경리 문학관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은하’에선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이슈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오로지 주인공들의 연애와 결혼문제에만 집중한다. 성적인 표현의 수위도 제법 높다. 조윤아 가톨릭대 교수는 “60대 초반 여대생 작가들이 군단처럼 등장해 연애와 결혼문제를 다루는 대중소설을 써 젊은층의 열띤 호응을 얻은 적이 있다”며 “장편 ‘은하’도 이런 상황 속에서 나온 것 같다”고 분석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책과 길] ‘토지’ 박경리, 달콤쌉싸름한 연애소설도 썼네
입력 2014-12-26 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