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한민수] 직장, 직장인

입력 2014-12-25 04:48 수정 2014-12-25 14:52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저까지 우리 집 식구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따뜻한 물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3대가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온수를 사용해본 적이 없다는 20대 구직자의 말에 국내 최고의 직장으로 꼽히는 S그룹 임원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결국 청년은 이 그룹의 저소득층 5% 할당 취업제도 혜택을 입어 꿈에 그리던 ‘직장인’이 됐다. 당시 면접에 참여했던 한 고위 임원은 “그 친구가 우리 회사를 3년만 다니면 회사 인근 도시에 30평대 아파트를 전세로 얻을 수 있다. 3대의 소원인 따뜻한 물을 원 없이 쓸 수 있다”면서 “기업이 나라도 하기 힘든 가난의 대물림을 끊고 한 가족의 인생사를 바꿔준 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직장(職場)과 직장인(職場人)이 2014년처럼 화두가 된 적이 있었던가.

직장생활의 애환을 담은 케이블 tvN의 ‘미생’은 그야말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를 보고 남편과 아빠의 고단한 삶을 이해하게 됐다는 아내와 아이들이 속출했다. 술을 먹고 새벽에 왔는데, 콩나물해장국이 끓여져 있는 아침 식탁을 보고 다른 집에 잘못 들어왔는지 헷갈렸다는 친구 얘기는 실화다. “회사 안은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다”는 극 중 인물의 대사를 듣고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은 우리네 직장인은 얼마나 될까.

"회사 안은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이 삽시간에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도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마카다미아를 조현아 전 부사장에게 주다가 영문도 모른 채 무릎 꿇고 사과해야 했던 스튜어디스, 매뉴얼을 찾다가 욕설과 봉변을 당한 뒤 비행기에서 허망하게 쫓겨난 사무장. 그리고 오너의 딸이 조사를 받으러 간 국토교통부 건물의 화장실 청소 상태를 챙겨야 했던 대한항공 말단 직원까지, 다 우리의 직장인이다.

회사가 다르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오너를 제외한 이 땅의 거의 모든 직장인이 겪었을 법한 얘기다. 상사의 갑(甲)질에 당하는 직장인들이 부지기수라는 얘기다.

온라인 취업 포털 사람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최악의 폭언’으로 “니 머리 진짜 장식품이냐”를 비롯해 인격 모독적인 말(29.3%)이 꼽혔다. 무시하고 깔보는 듯한 호통(사례: 개뿔도 모르면서 어디서 아는 척이야·24.8%), 노력을 비하하는 말(이걸 일이라고 한 거야·22.3%), 욕설·비속어(야, 이 건방진 새끼야. 이 새끼는 진짜 기본이 안 돼 있어·9.6%), 성희롱(여자가 따라주는 술이 잘 넘어가지·4.5%·중복응답)이 뒤를 이었다. 미생의 인기나 땅콩 회항에 대한 격한 반응의 이면에는 이러한 직장인들의 감정이입이 있었던 것이다.

스트레스 없는 직장은 불가능할까

하지만 직장인들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았다. 괜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60.3%), 불이익을 볼 거 같다(40.2%), 나뿐만 아니라 다들 참고 있다(33.2%), 어느 정도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13.4%·중복응답) 등이 그 이유다. 두 조사는 직장인 1008명, 734명을 대상으로 각각 이뤄졌다.

그럼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직장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일일까?

‘대통령의 글쓰기’란 책으로 유명한 라이팅 컨설턴트 강원국씨는 최근 발간한 저서 ‘회장님의 글쓰기’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구성원 상호간에 완벽한 신뢰관계를 구축하면 행복한 직장은 결코 환상이 아니다”고 했다. 라포르(rapport), 즉 ‘무슨 말이라도 털어놓고 할 수 있고, 말한 것이 충분히 이해되는 관계’를 만들면 되고, 마음과 마음이 주고받는 이심전심 상태가 되면 직장 유토피아는 가능하다는 게 강씨 논리다.

하지만 여기까지 읽은 독자, 특히 직장인들은 머리를 옆으로 돌리는 이가 대다수리라.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혀를 차며….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2015년 대한민국의 모든 직장인들이 미생(未生)을 벗어나 완생(完生)이 되는 꿈을 꿔본다.

한민수 문화체육부장 ms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