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놀던 아이들 “꿈이 생겼어요”

입력 2014-12-24 02:34
서울 관악구의 한 아파트 부녀회실에 차려진 ‘다솜 공부방’에서 여대생 선생님이 문제 풀이를 도와주고 있다. 다솜 공부방은 서울대생이 참여하는 봉사 동아리다. 다솜 공부방 제공

“아∼아∼그∼.” 민혁(가명·10)이는 조금만 흥분해도 말을 더듬곤 했다. 장애는 없는데 원체 말을 할 기회가 없어서다. 서울 관악구 임대아파트에서 할머니 황모(65·여)씨와 단둘이 산다. 할머니가 폐지를 주워 생계를 잇는 터라 하루의 대부분을 혼자 집에서 보냈다. 홀로 사는 법부터 배운 아이는 말을 하는 법엔 서툴렀다.

여섯 살 때 아빠를 교통사고로 잃은 희연(가명·9·여)이는 엄마와 둘이 지낸다. 엄마가 식당에서 일하는 동안 집에서 혼자 노는 일이 잦았다. 늘 친구들의 아빠를 부러워했고 학교에서는 남자 선생님을 쫓아다니며 사랑을 독차지하려 했다. 친구가 때렸다며 모함하거나 볼펜을 숨겨놓고 친구가 훔쳐갔다고 거짓말하는 등 동정과 관심을 사기 위한 행동도 있었다.

올 초 민혁이와 희연이 앞에 28명의 ‘언니·오빠’가 나타났다. 서울대 교육봉사동아리 ‘다솜 공부방’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주말을 제외하곤 매일 오후 4시30분부터 7시까지 아이들과 함께 놀고 공부를 가르쳤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민혁이와 희연이는 어떻게 변했을까.

민혁이가 처음 ‘다솜’에 왔을 때 했던 일은 구석에 혼자 앉아 책을 읽는 것이었다. 눈은 주변을 살피며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봤다. 한 아이가 “안녕” 하고 인사하자 당황해 “아…아…”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싸울 때면 더듬는 버릇이 도드라졌다. 뭔가 억울한데 표현이 되지 않아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민혁이를 조용히 방으로 데려가 달래는 것은 ‘대학생 선생님’ 몫이었다.

형과 누나들은 민혁이에게 생각을 글로 써보라고 했다. 그리고 소리 내 읽도록 했다. 6개월이 지나자 한결 여유롭게 생각을 표현하게 됐다. 한번은 친구가 자신의 볼펜을 가져가 자기 것이라 우길 때가 있었다. “가방 안의 필통을 열어봐. 거기에 나랑 같은 볼펜이 있으면 네가 지금 쓰고 있는 것은 내 볼펜일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과할게.” 민혁이가 또박또박 말하던 날, 선생님들은 “이제 가르칠 게 없으니 하산하라”고 농담을 건넸다.

희연이는 수시로 “나를 신경써주지 않는다”며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들은 그럴 때마다 묵묵히 안아주며 아빠 역할을 했다. 거짓말을 하거나 동정심을 유도할 땐 일부러 큰 소리로 혼을 냈다. 그 뒤엔 달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집에도 항상 여럿이 함께 데려다줬다. 마음이 안정되자 집착도 크게 줄었다.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늘어났다. 강보배(20·여·언론정보학과2) 회장은 “희연이가 남자 선생님들을 멀리하자 오히려 그들이 더 서운해했다”며 웃었다.

1994년 만들어진 다솜 공부방은 어려운 아이들을 대상으로 봉사한다. 월요일에 영어, 화요일에 수학과 체육, 수요일에 미술과 과학, 목요일에 수학과 교육기부 프로그램(국악 등 배우기), 금요일에는 영어와 특정주제 탐구를 가르친다. 교재비와 각종 비품, 간식비 등 월 80만원 정도 들어가는 운영비는 ‘다솜’에서 책임진다. 후원금으로 다달이 50만원 정도 들어오고 서울대에서 연 120만원을 지원해 주지만 부족해 늘 개인 주머니를 턴다.

임지훈 기자 zeitgeis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