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윤정구] 기업의 품격

입력 2014-12-24 02:20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한 외국계 기업에서 정년퇴임한 분에게 들은 이야기다. 자신이 정말 이 회사에 안 다녔더라면 지금과 같은 인격을 갖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 회사의 살아 있는 문화가 자신의 인격을 키워왔다고, 회사를 나온 지금도 자신이 다녔던 회사에 대해서 많은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고백을 듣고 나서 정말일까 하는 호기심에 이 회사에 다니는 다른 임직원 분들에게 정말 그런지 물어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분들도 대체로 그가 한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기업문화는 조직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종업원들 인격의 상당부분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와의 만남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자신의 회사가 좋은 문화를 가진 것은 종업원들에게 크나큰 선물이다. 반대로 종업원들이 조직의 문화적 인격을 탐탁지 않게 받아들일 때 조직의 인격과 종업원의 인격 사이에는 서로 겉도는 현상이 생기고 결국 종업원조차 조직의 인격에 대해 뒷담화를 늘어놓게 돼 있다. 하지만 아무리 뒷담화를 하고 거리를 두려고 해도 같이 오래 살다보면 탐탁지 않는 인격도 은연중에 자신의 한 부분으로 스며들게 돼 있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경우는 어떨까. 회사 때문에 좋은 품성을 갖게 됐다고 고백하는 종업원이 있는 대기업은 얼마나 될까.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회의적이다. 최근 땅콩 회항으로 불거진 대한항공 3세 경영인 조현아씨 사건에서 대기업이 가진 인격의 한 단면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대기업 하면 인격은 고사하고 자신의 종업원에게까지 ‘갑질’을 일삼는 장본인을 연상한다.

어떤 회사가 제대로 된 품격이 있는 회사인지는 이 회사가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해 있어도 자신이 한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지를 통해서 판가름 난다. 대한항공 홈페이지를 보면 이 회사는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임직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고 있었다. “임직원의 존엄성을 존중하며 회사의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의 조 전 부사장 행태를 보면 심지어 회사의 부사장도 이런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음이 명명백백 밝혀졌다. 약속처럼 종업원을 소중한 자산으로 여기기보다는 이윤을 축적하기 위한 수단 혹은 자신의 수하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부 고객인 종업원에 대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회사가 진정 고객에 대한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없다. 단지 이윤을 위해 문제가 안 생기는 수준에서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진정성 없이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서비스 품질 수준이 고도화돼 품질만으로는 차별화가 더 이상 불가능해지는 경영환경 속에서 차별적 경쟁력을 제공해주는 것은 회사가 가진 문화로부터 우러나오는 이 회사 고유의 성품이다. 이 성품은 회사 직원들의 의사결정과 고객들과의 만남 국면에 스며들어 이 회사만의 독특한 향기를 가진 체험을 제공해준다. 이런 품격 있는 체험을 제공해줄 수 있는 기업을 초일류기업이라고 칭한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한 조종사는 회사의 일에 대해 자신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자조적으로 “단지 운에 의해서 인품이 좋은 후세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린다”는 말로 표현했다. 대한항공의 문제는 2, 3세 경영이 가속화되고 있는 한국 재벌기업들의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를 보여주고 있다.

단 몇 퍼센트의 주식으로 경영지배권을 행사하는 재벌의 존재 이유에 대한 여론은 품성의 문제가 불거지면 불거질수록 점점 설 땅을 잃는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재벌기업들이 자신의 사업 영역에서 글로벌 시민들에게 대한민국의 품격을 체험하게 하는 대표회사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초일류기업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윤정구 이화여대 경영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