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옷차림 1등석 안돼”… 탄로난 CIA 요원 위장술

입력 2014-12-23 02:03

어느 이른 아침 유럽의 한 공항. 신분을 숨긴 채 비행기를 타려던 미국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이 곤경에 처했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외교관 여권을 내민 것이 화근이었다. 공항 직원들은 진짜 외교관인지 의심돼 2차 검색을 실시했고 수하물에서도 폭발물 양성 반응이 나왔다.

추궁이 시작됐다. “당신 테러리스트지?” “아니요, 나는 미국에서 대(對)테러 교육을 받았을 뿐이오.” 공항 직원들은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차례 이어진 질문 공세에도 그의 답변에는 모순이 없었다. 공항 직원들은 그를 풀어주고 출국을 허락했다.

첩보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이야기는 CIA가 2011년 작성한 문건 ‘신분을 숨기고 국경을 넘나드는 비밀요원을 위한 매뉴얼’에 소개된 실제 이야기다. 문건 작성자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잘 꾸며낸 이야기를 미리 준비해야 2차 검색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고 충고했다. 위키리크스는 21일(현지시간) 이 매뉴얼을 공개하며 “폭발물 흔적이 있는 CIA 요원은 유럽에서 대체 무엇을 했으며 공항 직원들은 왜 그를 순순히 놓아줬느냐”고 꼬집었다.

문건은 미국이 다양한 경로로 입수한 세계 각국의 입·출국 관련 비밀정보를 토대로 작성됐다. 항공권 구입 요령부터 수하물 관리, 옷차림, 행동거지 등 각종 주의사항들을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현금으로 항공권을 사서는 안 된다. 출국 당일이나 직전에 구입해도 좋지 않다. 편도 항공권도 의심을 사기 좋다. 부유한 사업가가 3등석을, 허름한 여행객이 1등석을 타는 등 격에 맞지 않는 항공권도 금물이다. 군인·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할인 혜택을 받은 기록이 남아도 신분이 탄로 날 수 있다. 위조 여권을 사용한다면 여권 발행국 언어에 유창해야 하며, 하루에 여러 국가를 드나드는 등 비정상적인 여행 일정이 남아서도 안 된다.

수하물에도 신경 써야 한다. 여행 기간에 비해 수하물이 지나치게 많거나 적어서도 안 된다. 출장이 잦은 사업가 행세를 한다면 여행가방 속을 가지런히 정리해야 한다. 여행객으로 위장해놓고 목적지와 무관한 곳의 지도나 여행책자를 갖고 다녀서도 안 된다. 위장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고가의 카메라도 부적절하며, 여행 목적에 비해 카메라 메모리카드 용량이 지나치게 많거나 적어도 안 된다.

위키리크스는 이 매뉴얼과 별도로 ‘쉥겐 개요’라는 또 다른 CIA 문건을 함께 공개했다. 유럽연합(EU) 국가 간 통행 제한을 최소화한 ‘쉥겐 조약’ 체결 이후 유럽 출입국 시스템을 분석한 문서다. 생체정보 등록, 불법 이민자 데이터베이스 구축 등 유럽 출입국 당국이 도입한 첨단 기술들을 소개한 뒤 “미국 국적자에겐 대부분 해당 사항이 없어 첩보활동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총평했다.

위키리크스 창립자인 줄리안 어산지는 성명에서 “CIA는 부시 행정부 당시 이탈리아, 스웨덴 등 유럽연합 국가에서 납치를 자행했다”며 “이 두 문건은 CIA가 오바마 행정부 하에서도 유럽 국가를 대상으로 비밀 임무를 수행 중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위키리크스가 이번에 공개한 문서에는 기밀사항을 뜻하는 ‘시크릿(SECRET)’ 표시와 함께 동맹국 정보기관과도 공유를 금지한다는 ‘노폰(NOFORN)’ 표시가 붙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