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정진영] 사자성어

입력 2014-12-23 02:10

사자성어(四字成語)의 맛은 함축과 비유에 있다. 축약 속에는 은유의 형식을 빌린 시대정신의 메시지가 담긴 경우가 많다.

구직자 등이 꼽은 올해의 사자성어에는 그들의 심사가 그대로 내포됐다. 한 온라인 취업 포털이 최근 구직자 및 직장인 1300여명에게 ‘올해를 규정짓는 사자성어’에 대해 물은 결과 ‘몹시 고되고 힘들었다’는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첫 번째였다. 또 ‘걱정이 많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전전반측(輾轉反側)과 ‘온갖 애를 썼지만 보람이 없다’는 노이무공(勞而無功) 등을 많이 선택했다. 이들 모두 신산한 삶을 이어왔음이 드러나 짠하다.

올 한 해 대기업들의 상황을 표현한 사자성어도 눈길을 끌었다. 삼성은 여리박빙(如履薄氷·얇은 얼음판을 밟듯 아슬아슬함), 롯데는 호사다마(好事多魔·좋은 일에는 탈이 많음), 대한항공은 사면초가(四面楚歌·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임), SK는 파란만장(波瀾萬丈·일에 엄청난 변화와 어려움이 많음) 등으로 묘사돼 처한 상황이 생생히 녹아 있다.

지난해 12월 북한의 김정은이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한 직후에는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딴마음을 먹는다’는 양봉음위(陽奉陰違)가 회자됐다. 노동신문이 장성택을 비판하면서 활용했다.

사자성어는 세태를 희화적으로 풍자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뼈를 깎는 아픔’을 나타내는 사자성어가 뭐냐는 질문에 개그우먼 김신영은 ‘양악수술’이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교수신문이 2001년부터 매년 발표한 올해의 사자성어에는 당시의 사회상이 배어 있다. 2008년 호질기의(護疾忌醫·결점을 감추고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 2009년 방기곡경(旁岐曲逕·샛길과 구부러진 길), 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귀를 막고 종을 훔침), 2012년 거세개탁(擧世皆濁·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썩었음) 등으로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2014년의 지록위마(指鹿爲馬) 역시 ‘농락’ ‘호도’를 나타내는 불편한 어휘다. 선뜻 인용하고 싶은 밝고 따뜻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언제쯤 만날까.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