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탄·총격에 먼 타국으로 내몰린 난민촌 아이들에… 크리스마스를 돌려주자

입력 2014-12-23 02:42
#레바논의 난민 정착지 베카 계곡에 사는 8세 소년 나우팔은 ‘이슬람국가(IS)’가 장악한 시리아 북동부 락카 출신이다. 가족 몇몇과 함께 피난 온 나우팔이 가장 그리운 건 난리통에 헤어진 아버지와 학교다. 노트와 펜을 쥐어주자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힘겹게 몇 문장을 써 나간다. “나는 학교가 정말 좋아요. 너무 그리워요. 시리아로,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빠 잊지 않을게요.”

#11세 꼬마 숙녀 하난은 이곳에서 ‘하난 선생님’으로 불린다. 어린 난민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정착촌 벽에 분필 대신 흰 돌로 알파벳을 쓰고 읽는 하난과 아이들의 눈빛은 무척이나 진지하다. 포탄과 총격에 먼 타국까지 내몰린 이 아이들에게 학교는 고향과 일상에 대한 그리움이자 잊지 않기 위한, 아니 잊혀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성큼 다가왔다.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와 캐럴, 낭만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하지만 유난히 다사다난했던 2014년 전쟁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전 세계 난민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수많은 겨울날 중 하루에 불과하다. 특히 동심을 만끽해야 할 어린이들은 하루하루 생계유지로 바쁜 어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쓰레기를 뒤지거나 고된 일터로 내몰려 그 어느 때보다 춥고 쓸쓸한 연말을 보내고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 집계에 따르면 내란이나 외침, 빈곤 등으로 자국 국경을 넘은 난민의 수는 올해 상반기에만 33만700명이 증가해 12월 현재 총 124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국제이주기구(IOM)는 18일 세계 이주자의 날을 맞아 발간한 보고서에서 국경을 넘지는 않았지만 자국 내에서 사실상 난민으로 전락해 떠도는 이들까지 더하면 전체 난민 규모는 5000만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IOM은 “5000만명 난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라고 덧붙였다.

난민 사망자도 올 한해 4868명으로 집계돼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쪽배에 의존해 지중해를 건너다 익사한 ‘보트피플’이 3224명이었고 인도양 벵골만, 멕시코·미국 국경에서도 각각 540명, 307명이 희생됐다.

특히 전쟁에 집과 학교를 잃고 희생된 어린이들이 급격히 증가했다. 유니세프는 지난 8일 올 한해를 결산하면서 “2014년은 어린이들에게는 공포, 두려움, 절망의 한 해가 됐다”는 지적과 함께 최대 1500만 어린이가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남수단,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무력 분쟁에 희생되거나 난민으로 전락했다고 밝혔다.

허핑턴포스트는 최다 난민 배출국인 시리아에서만 전체 난민의 절반에 달하는 약 150만명이 어린이들이라고 전했다. 이는 뉴욕 맨해튼 전체 인구와 맞먹는 숫자다. 최근 UNHCR과 국제구호단체 함디 재단은 인적 없이 버려진 맨해튼의 모습을 동영상에 담는 ‘맨해튼 비우기 프로젝트’를 통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시리아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다.

난민촌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를 돌려주자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는 ‘난민 어린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만찬 릴레이’가 첫 시작을 알렸다. 아이들은 따뜻한 식사를 함께 하고 크리스마스 이야기로 꾸민 인형극과 캐럴을 즐겼다. 가족에게 돌아가는 아이들의 손에는 음식 바구니가 하나씩 쥐어졌다.

12월 한 달 동안 모두 1000여명의 아이들에게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전파할 이번 행사는 베이루트를 시작으로 나우팔과 하난이 지내고 있는 베카 정착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윌리엄 머레이 종교자유연합 회장은 “사상 최악의 난민 사태로 베이루트만 해도 인구가 1년 사이 2배가 돼버렸다”고 밝혔다. 그는 또 “예산이 모자라 전체 난민 가족 중 4분의 1 정도만 행사에 초청됐고, 그마저도 한 가구에 한 명의 어린이만 올 수 있었다”면서 “국제사회의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중동의 박해받는 기독교인과 난민들에게 수차례 지원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던 가톨릭은 이라크와 시리아 난민들을 위해 미국에서만 220만 달러(24억2000만원)의 기부금을 모았다. 추위를 피할 판잣집 한 칸 구하지 못해 떨고 있는 난민들의 비상 거주처를 만드는 데 사용될 예정이다.

프랑스 남부지방에는 크리스마스 때 고기요리를 마련해 첫 부분은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고 그 후에 가족끼리 만찬을 즐기는 풍습이 남아 있다. 영미권에서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이자 성탄 연휴를 일컫는 ‘박싱데이(Boxing Day)’는 곡물과 헌금 등 실질적 도움이 되는 물품을 박스에 담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달하던 데서 유래했다.

‘난민 어린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밥 암스트롱 목사는 “크리스마스의 역사와 함께한 오랜 나눔의 전통처럼 지금 이 순간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난민들, 특히 어린이들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할 때”라고 당부했다. 금세기 들어 유례없는 전란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로 가득한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가난하고 낮은 자들 곁에 서기 위해 이 땅에 온 그리스도의 탄생, 그 본연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인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