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추워. 왜 이렇게 공연 시간이 늦어지지?”
올해 90세인 고려인 김수라 할머니는 추위 속에 공연을 기다리느라 힘들었지만 웃음을 잃지는 않았다. 고향에서 온 기독 단체와 청년들이 수준 높은 공연으로 시름을 달래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함께 교회에 온 동료들과 흥겨운 장단에 맞춰 어깨를 들썩였다.
김 할머니 등 기독 고려인 300여명은 지난 17일(현지시간) 저녁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성경교회(양영근 목사)에서 열린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 그랜드콘서트’(대회장 강석진)에 참석했다.
고려인들은 체감온도가 영하 30도를 밑돈 이날 태권도 공연팀 단원들이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난이도 높은 격파시범을 선보이자 “와” 하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공중회전을 하면서 격파에 성공할 때마다 고려인들은 박수를 보냈다. 박진감 넘치는 태권도 군무도 갈채를 받았다. 춤을 가미한 겨루기는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고려인들은 멋진 태권도복과 태권도 시범을 카메라에 담았다.
테너 이현과 김병진, 카운터테너인 김기욱이 무대에 올라 공연의 흥을 더했다. 성악가들은 이탈리아 가곡과 함께 우리 가곡인 ‘그리운 금강산’ ‘내 마음의 강물’ 등으로 고려인들의 향수를 달랬다.
공연이 끝날 무렵, 참석자들은 ‘고향의 봄’ ‘오빠생각’ 등을 합창했다. 한국과 러시아가 서로 협력해 우리 민족의 염원인 한반도 평화통일을 앞당겨 달라고 한마음으로 기도하기도 했다.
공연을 본 고려인 3세 헨 옐레나(47·우스리스크 소남교회)씨는 “한국의 태권도(시범)를 본 적이 없는데 오늘 이렇게 보니 감정이 북받친다”며 “비록 러시아말을 하고 러시아에서 살고 있지만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고려인 3세 김제냐(43·우수리스크 새생명교회)씨는 “한국문화는 매우 뛰어나다. 오늘 태권도 시범은 내가 본 공연 중 최고였다”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태권도 시범단과 성악가들은 지난 16일과 18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예술학교와 17학교에서도 공연해 러시아인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태권도 시범을 한 청년 김영우(21·나사렛대 태권도학과3·부천 참빛교회)씨는 “태권도로 전 세계를 돌며 선교하는 게 꿈이다. 믿지 않는 영혼구원을 위해 이 한 몸을 바칠 각오가 돼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현재 연해주에는 약 5만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이 지역 고려인들은 구소련 시절인 1937년 9∼10월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약 17만명이 중앙아시아로 이송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고려인들은 연해주 라즈돌리노예역에 집결해 장장 45일(지금도 기차로 1주일 걸린다) 동안 기차 화물칸에 실려 이동했다. 열차 속에서의 45일은 죽음과의 사투였다. 배가 고프거나 추위 등으로 사망하는 고려인들이 속출했다. 고려인들은 91년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다시 연해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그랜드콘서트 운영위원장 이번성 목사는 “고려인 연해주 이주가 시작된 지 150년이 되는 해에 이런 행사를 개최해 기쁘다”며 “유라시아 철도의 연계지역인 한국과 연해주와의 문화교류는 한국과 러시아의 새로운 관계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수리스크(러시아)=글·사진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역경과 고난 딛고 150년… “한국문화 접하니 감격”
입력 2014-12-22 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