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새벽을 꿈꾼다

입력 2014-12-22 02:26

새벽이 더디다. 겨울밤은 길어서 날이 밝자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창밖의 칼바람만 더욱 매서워지고 있다.

세밑, 그것도 머잖아 성탄절인데 활기가 없다. 종종걸음 치는 사람들, 모두가 지쳐 보일 뿐이다. 집권 2년차인 올 갑오년의 시작과 함께 정부는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고 경제혁신3개년계획까지 내놓으면서 기대를 모았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실망과 한숨밖에 없기 때문이다. 계획만 덩그러니 선포됐고 세월호 참사가 겹치면서 후속 조치가 따라주지 않은 탓이 크다.

게다가 세월호 사태가 수습될 무렵 터져 나온 청와대 문건유출사건은 덜 아문 상처에 소금이라도 뿌리려는 기세로 세간을 달궜다. 대통령 측근 간 권력다툼의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들은 한심함에 분노했다. 검찰은 고작 전 청와대 행정관의 1인 자작극으로 결말을 지으려는 모양이지만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대체 대한민국은 어디서부터 망가져 있는 걸까. 전후에야 겨우 독립했으면서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성공시킨 나라, 원조를 받던 최빈국에서 원조를 하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나라, 무역규모 1조 달러를 돌파한 IT강국, 한류 붐을 일으킨 다이내믹 코리아의 문화강국 등 숱한 찬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자괴감이 밀려온다.

지금 우리가 겪는 자괴감은 산업화·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한 이후 새로운 가치 구축에 실패했기 때문은 아닐까. 1980년 5월 광주를 겪으면서 한국 민주주의는 사망선고를 받았지만 87년 6월항쟁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로부터 27년, 오히려 한국사회는 ‘87년 체제’라는 화려한 과거에 발목이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역설적이게도 다시 불임이 시작된 것이다.

수많은 민주화운동가들조차 기득권 세력으로 탈바꿈한 세월 속에서 우리 사회는 겉만 번지르르한 세상으로 변질되고 있었던 것이다. 의제가 넘치고 슬로건이 폭주하지만 사회가 공동으로 추구해야 할 기본적인 가치는 일찌감치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에서 확인된 ‘함께의 부재’가 그렇고 ‘나·우리만의 이익에 혈안인 행태’가 그랬다.

산업화, 민주화 이후의 새로운 가치를 찾아냈어야 했다. 그중 하나가 통일이라고 본다. 통일을 이 사회의 최고가치로 높여서 공감대를 넓혀가야 했다. 장삿속 이문만을 추구하는 식으로 ‘통일대박’ 운운해서는 곤란하다. 산업화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하더라도 70, 80년대 민주화운동에 돈 벌자고 뛰어들었고 잘 먹고 잘 살자고 목숨을 내걸었던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식민지 백성의 설움과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내달렸던 산업화의 열망, 배고픔에서는 벗어났지만 좀 더 사람다운 삶을 위해 뛰어들었던 민주화의 열정도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오랜 대립과 갈등의 심연에서 벗어나는 품격 있는 한반도를 모색하는 일이다. 역사 앞에 바로 서는 일이 남은 것이다.

올 성탄절은 지난 27년간의 ‘87년 체제’를 곱씹어보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성탄은 매년 그렇듯이 새로운 생명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가치를 내놓지 못하고 공감대를 만들지도 못하는 불임의 시대를 향해 새 생명으로 가득 채우라는 명령이 바로 성탄의 참 뜻이다.

지금 비록 혼돈과 자괴감으로 뒤섞인 때를 지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새 생명을 잉태하는 꿈을 꿔야 한다. 다니엘의 친구들이 한 고백처럼. 다니엘의 친구들은 바빌론의 왕이 세운 신상에 절하기를 거절해 불구덩이로 떼밀릴 처지에 놓였을 때 하나님의 도움이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한편, 만에 하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다니엘 3:18) 임금의 신상에 결코 절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국민행복시대는 ‘함께 잘사는 사회’ ‘올바르게 잘사는 사회’에 대한 공감대 없이는 헛구호에 불과하다. 꿈을 꾸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겨울밤이 깊어갈수록 새벽은 가깝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