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보호 위해 만든 ‘방패’ 54년 만에 ‘칼’이 되다

입력 2014-12-20 11:22 수정 2014-12-20 03:09
시민들이 19일 서울역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속보를 대형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 서영희 기자

우리나라 정당해산심판 제도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벌였던 부당한 야당 탄압을 막기 위해 만든 ‘방패’였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도 19일 결정문 서두에서 “정당해산심판은 정당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 ‘칼’이 됐다. 헌재는 정당 보호 측면보다 민주적 기본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가치에 더 무게를 뒀다. 통합진보당은 이 제도로 해산된 첫 정당으로 기록됐다.

광복 이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에는 별도의 정당 관련 법규가 없었다. 정당은 일반적인 정치 결사나 단체 정도로 취급됐다. 이 때문에 정당을 보호하거나 규제하는 법안도 없었다. 이는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에 야당을 탄압할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1958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혁신계 정당인 진보당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대통령 공보실장 발표에 따른 일반 행정처분으로 진보당을 ‘등록취소’해버렸다. 이듬해엔 진보당을 이끌던 죽산 조봉암 선생을 교수형에 처했다.

4·19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은 1960년 6월 헌법을 개정하면서 처음으로 정당해산 조항을 마련했다. 해산결정권은 헌재에 독점적으로 부여됐다(하지만 헌재 설립은 5·16군사쿠데타로 무산됐다. 1987년 개헌 이듬해에야 구성됐다). 국회와 정부가 야당을 자의적으로 탄압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정당해산 절차를 엄격하게 했다. 당시 헌법 13조 2항은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 정부가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소추하고, 헌법재판소가 판결로 정당 해산을 명한다”고 규정했다. 현행 헌법의 해산 규정과 유사하다.

법에 정당 보호 근거가 마련됐지만 이후에도 수난은 계속됐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정당들이 해산됐고, 박정희 정부는 1972년 유신헌법 선포 전에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활동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1980년 12·12군사쿠데타 직후에도 정당들은 해산의 길을 걸었다. 모두 정변 상황이었고, 헌법 절차를 따른 해산은 아니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 개정된 현행 헌법 역시 정당해산심판을 헌재가 맡도록 해 정당 해산 요건을 제한했다.

정당해산심판 제도는 제2공화국 때 마련됐지만 정당해산이 실제 청구된 적은 없었다. 정당해산심판에 관한 종합적 연구도 많지 않았다. 한국공법학회는 헌재 의뢰를 받아 2004년 12월 ‘정당해산심판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통진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이 17대 총선에서 10석으로 원내 진출에 성공한 해였다. 정태호 경희대 법대 교수 등 연구자들은 이 논문에서 정당해산심판 제도의 목적은 해산이 아니라 보호에 초점이 있음을 강조했다. 연구자들은 “해산심판제도는 자유(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정당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며 “정당해산제도는 국민의 민주역량에 대한 불신의 소산”이라고 밝혔다.

단, 연구자들은 해산 대상인 당의 지도부와 주요당직자, 지역조직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어긋날 경우 이를 정당 활동으로 볼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번 정당 해산 사건에서도 유사한 논리가 적용됐다. 박한철 소장은 “해산심판 제도는 정치적 탄압으로 남용되지 않도록 엄격하고 제한적으로 운영돼야 한다”면서도 “폭력적인 정당이 민주주의 체제를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해산 제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