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진당 해산 선고] 한때 의석 13석 3년만에 ‘사망선고’

입력 2014-12-20 02:41

이석기 의원의 ‘지하혁명조직(RO)’ 사건으로 종북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통합진보당이 창당 3년 만에 결국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한때 진보정당 역사상 최대 의석을 창출하며 정당 지지율 10%를 돌파하기도 했지만 헌재에 의한 정당해산 파국을 맞았다. 장막에 가려진 비례대표 부정공천 파문, ‘NL’로 지칭되는 종북세력이 장악한 당 조직, 일방적인 친북 정강정책 등이 자초한 결과라는 평가다.

◇원외 세력에서 원내 정당으로=통진당의 뿌리는 1997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기반으로 한 원외정당 ‘국민승리21’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민승리21은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을 설립했고 2002년 16대 대선에선 권영길 후보를 출마시켰다. 권 후보는 당시 3.9%의 지지율을 얻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선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진보정당 최초의 원내 진출이었다.

겉으로는 성공한 진보정당이었지만 당 내부에는 극심한 혼란이 만연했다. 바로 종북주의 때문이었다. 2006년 10월 발생한 ‘일심회’ 사건은 당을 양분하고 있던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 계열의 대충돌을 야기했다. PD쪽에서는 NL의 조직적인 조작과 당내 민주주의 파괴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고 비난했다. 2008년 2월 대선 패배 책임론까지 불거지자 PD계열인 심상정 의원과 노회찬 전 의원이 탈당해 진보신당으로 ‘따로 살림’을 시작했다. 당 분열 때문인지 같은 해 치러진 18대 총선에선 국회 의석수가 반 토막(5석)으로 줄어들었다.

◇분열과 몰락의 나락으로=갈라졌던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2011년 대통합 논의를 시작했다. 이듬해 4월 19대 총선을 위해서였다. 이정희 민노당 대표와 심상정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대표만이 아니었다. 진보적 성향의 ‘스타 정치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만든 참여당까지 통진당의 이름으로 한꺼번에 합쳐졌다. 이른바 ‘진보 삼두마차’가 탄생한 것이다. 돌풍을 일으킬 것이란 기대가 일었고, 총선에서 진보정당 역사상 최다인 13명의 후보를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다. 당시 제1야당이던 민주통합당이 먼저 야권연대를 제의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삼두마차의 허니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총선이 끝난 직후 “NL계가 조직적으로 비례대표 경선과정에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터졌다. 당 중앙위원회 폭력사태, NL계의 노골적인 종북 성향과 억지 주장 등이 고스란히 노출됐고 당 지지율은 급전직하했다. NL계가 장악한 당권파의 대표주자였던 이석기 의원의 존재도 이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의원이 장막 뒤에서 모든 공천과 자금을 좌지우지해 왔다는 심증만 국민들에게 심었다. 이 의원과 NL계인 경기동부연합 등을 모르는 국민이 없을 정도였다. 그때 이 의원은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는 발언까지 해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치명타가 된 RO사건…‘종북 정당’이라는 낙인=통진당은 2012년 18대 대선에서 이정희 대표를 후보로 내세우는 등 정당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 후보는 TV토론에서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출마했다”는 등 튀는 발언을 이어갔지만 이미 국민들의 마음은 통진당을 떠나 있었다. 이 후보의 이 발언은 오히려 보수층 결집만 불러왔다는 야권의 비판까지 받아야 했다.

통진당은 지난해 8월 RO 결성을 주도한 이 의원이 내란음모 혐의로 검찰에 구속 기소되면서 회생 불가능, 파산 일보직전의 상태로 돌입했다. 당시 여당뿐 아니라 야당까지도 이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일사불란하게 이를 통과시켰다. “혁명조직의 비밀회합이었고 참석자들이 총기를 구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한 것으로 드러나자 ‘통진당=종북 정당’이란 도식이 일반국민의 상식이 돼버렸다. 이때부터 새정치민주연합과 정의당 등 야권도 통진당과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