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손영옥] 땅콩 회항과 아름지기

입력 2014-12-20 02:30

‘땅콩 회항’ 사건의 유탄을 맞은 시민단체가 있다.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는 비영리단체 (재)아름지기다. 지난 9일 언론사 미술 담당 기자들의 ‘카톡 방’으로 긴급 공지가 날아들었다. 아름지기가 10일 예정했던 기자간담회를 취소한다는 내용이었다. 여승무원이 ‘땅콩을 봉지째 서비스한’ 것에 화가 폭발해 비행기를 회항시킨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의 비상식적 행동이 언론에 보도된 다음날이었다. 취소 이유는 ‘사모님들의 변심’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렇다. 아름지기는 재벌가 사모님들이 중심이 돼 발족한 시민단체다. 2001년 11월 생겼으니 만 13년이 넘었지만 처음 듣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번 기자간담회는 창립 이후 처음 갖기로 한 자리였으니까. ‘사모님들 모임’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을 우려해 노출을 꺼려왔던 것이다. 그러다 제법 연혁이 됐으니 용기를 냈던 차에 사건이 터졌다. 당초 신연균 이사장(중앙일보·JTBC 홍석현 회장 부인)이 참석해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내년 사업계획에 대해 발표키로 했었다.

결과적으론 정무 감각이 뛰어난 판단이 됐다. 땅콩 회항 사건의 파장은 일파만파 번졌다. 당사자의 사표로 불길이 잡히지 않아 부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자식 교육을 잘못한 내 탓’이라고 공식 사과했다. 조 전 부사장은 시민단체의 고발에 따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까지 받아야 했다. 아름지기의 32명 운영위원에는 삼성전자, 금호아시아나, 효성 등 내로라하는 기업의 오너 회장 사모님이 포진해 있다. 땅콩 회항 사건의 주인공인 조 전 부사장의 어머니도 운영위원 중 한 명이다. 괜히 기자간담회로 주목받아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을 터다.

아름지기의 활동이 이번 사태로 다시 ‘음지’에 묻히는 게 아니냐며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현재까지의 활동을 담은 ‘아름지기 백서’는 두께는 얇지만 활동 범위와 깊이는 녹록지 않다. 처음엔 궁궐 청소와 마을 정자나무 가꾸기 등 소박한 봉사활동으로 출발했다. 점차 창덕궁 낙선재의 조경 정비, 경복궁 등 5대궁의 안내 입간판 기증 등으로 보폭을 넓혔다. 전통문화 강좌나 ‘의·식·주’를 주제로 한 전시에서는 아마추어리즘을 넘어선 전문성의 냄새가 난다.

아름지기의 존재는 정부 부문을 보완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거야말로 시민단체의 존재 이유다. 궁궐 안내판 디자인 개선사업은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이 정부 예산이 부족하니 도와 달라고 요청해서 선뜻 나선 것이다. 자체 기금을 조달하고 타이포그래퍼 안상수 교수(홍익대)를 비롯한 전문가의 손길을 거쳐 제작한 궁궐 안내판은 공공디자인의 전범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재벌가 사모님이 하는 일이다보니 프로젝트마다 기금이 무리 없이 마련되고 남편이 가진 네트워크도 충분히 활용된다.

혹자는 재벌 사모님들의 호사 취미라고 깎아내린다. 하지만 말 그대로 호사 취미생활로 보내버릴 수 있는 노년의 삶의 방식이나 사회적 책무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면 탄생하기 힘든 봉사활동이다. 우리 사회가 외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좋은 예다. 개인회원과 기업회원까지 동참하고 있다. 건축가, 변호사, 사진작가 등이 이사로 참여해 재능기부도 하고 있다. 그만큼 공감을 사고 있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은 건 언어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아름지기 운영위원 중에도 성격이 괄괄한 사모님이 계신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우리 사회가 기대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언행 모두에 해당한다. 서울시향 박현정 대표의 막말이 대표 재직 시 거둔 경영개선 성과를 가려버린 사태는 아름지기에 ‘반면교사’가 되었으면 한다.

손영옥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