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送舊迎新)의 계절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이 사자성어는 이 즈음 가장 흔히 들리는 한 해 인사다. 묵은해와 새해의 선명한 대비는 자연스럽게 옛것은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한다는 연상으로 이어진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보니 송구영신은 관가에서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단순한 사자성어가 연말연시의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새해를 맞는 사람들의 어떤 보편적 마음가짐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마음 말이다.
나는 이 사자성어의 단순명료함이 말하지 않는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송구영신’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삶의 태도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어쩌면 이 사자성어는 시간에 대한 오해를 무심결에 퍼트리고 있는 게 아닐까. 지나간 일은 그냥 옛일로 잊어버리면 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유포하는 것은 아닐까.
송구영신은 우리 스스로가 시간을 좌우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묵은해를 ‘보낸다’는 타동사는 ‘내가’ 또는 ‘우리가’라는 주어를 상정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가 보내거나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 앞에 우리는 철저한 객체다. 2014년을 아무리 보내지 않으려 붙잡아봐도 무심히 지나갈 것이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시간은 유유히 흘러간다.
다행스럽게도, 시간 앞에 우리가 무기력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주체가 되어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다. 물리적인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돌이켜 성찰하는 것은 가능하다. 반성(反省)은 흘러간 시간을 되돌아보는 행위다. 흐르는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돌아봐야 할 일들이 있다. 2014년에도 망각에 맞서 사회적·집단적 기억으로 만들어야 할 일들이 있다.
“세월호 참사를 잊으면 대한민국이 잊혀집니다!”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위원회가 기자들에게 보내는 휴대폰 문자메시지에는 매번 같은 문구가 말꼬리처럼 달려 있다. 절박한 호소다. 지난 4월 16일은 유가족에게 생애 가장 가슴 아픈 날일 것이다. 없었어야 할 일, 그래서 지워버리고 싶은 날일 것이다. “매일이 4월 16일”이라고 말하는 유가족의 고통을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그들이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고 호소한다.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사회는 이미 세월호 참사를 많이 잊어버린 듯하다. TV와 신문을 도배하던 세월호 관련 뉴스는 이제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참사 당시 정치인들은 너나없이 ‘세월호 이전과 이후, 대한민국은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8개월이 흘렀다. 300여명의 희생자가 생긴 것 말고 과연 한국사회가 달라진 것이 무엇일까.
세월호 참사는 잊어서는 안 될 ‘옛일’이다. 4월 16일의 비극을 해가 바뀌었다고 잊어버린다면 지난 시간 우리의 애도는 한낱 집단우울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20일 그들을 위로해준 국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개최하는 행사 이름은 ‘0416, 기억하고 함께 걷다’라고 한다.
한국사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또 있다. 이맘때쯤 발표되는 ‘국내 10대 뉴스’는 어쩌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의 목록이다. 한 언론사가 지난 15일 발표한 2014년 10대 뉴스에는 세월호 참사를 포함해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윤모 일병 폭행 사망 사고, 청와대 비선 의혹 파문 등이 포함됐다.
그러니까 2014년 우리는 적어도 경기도 연천 28사단에서 선임병들의 구타로 숨진 윤 일병의 참혹한 죽음을, 프란치스코 교황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연말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는 청와대 주변의 어떤 사건도 한낱 해프닝으로만 소비한다면 아무런 교훈도 남지 않을 것이다.
입바른 소리를 했지만 나 자신부터 돌아본다. 부끄러운 일들이 머리를 스친다.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아내에게 자주 짜증을 낸 것, 아이들과 있을 때도 스마트폰에 정신을 판 것, 누군가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평가한 것. 이런 잘못들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되돌아보는 것은 좀더 나은 내가 되게 할 것이다. 지난 1년을 그냥 보내는 사람과 반성하며 보내는 사람의 삶은 조금은 다를 것이다. 10년을 흘려보낸 삶과 10년을 반성하며 보낸 삶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해도 마찬가지다. 반성하는 사람은 성장하고, 반성하는 사회는 성숙한다.
그러니 송구(送舊)영신을 조금 비틀어 써본다. 지금은 성구(省舊)영신의 계절, 그러니까 지난 시간을 되돌아 살펴보고, 다가올 시간을 기쁘게 맞이해야 할 계절이다.
임성수 정치부 기자 joylss@kmib.co.kr
[창-임성수] 송구영신, 성구영신
입력 2014-12-20 0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