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절을 문맥과 함께 보지 않아서 왜곡된 사용을 하는 경우가 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7)가 그중 하나라고 우리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이 구절은 빌닷이 욥을 훈계하며 하는 말인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욥의 친구들은 욥의 현재 처지를 잘못 이해하고 훈계하였기 때문에 이 말의 저의를 생각하면 인용해서 좋을 말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이 말은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 아니라 빌닷의 자기 견해를 합리화하기 위한 말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구절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만 떼어놓고 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전능함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여기서 모든 것은 전능함이 아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2절)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성경만 보더라도 우리가 성경을 우리 입맛에 맞게 왜곡해서 소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땅콩회항 사건이라고 부르는 뉴스들이 나오는데 그중 항공사 관계자가 국토교통부 화장실 청소를 다시 요청했다는 기사를 흥미 있게 보았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아무리 조사를 받는 처지라도 하늘 높은 상관인데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이 이래저래 보필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혹시나 그분께서 청결에 관한 강박적인 면이라도 있다면 화장실 사용에 각별한 신경을 미리 써놓아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들이 와서 청소를 해야 할 것 아니야. 왜 시키고 난리야. 괜히 높으신 분 욕 더 먹일 일을 하고 있어! 아랫것이 잘못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을 한 구절만 보고 오해하면 안 되듯이 이 상황도 더 넓게 보면 알아서 기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설령 직접 지시하지 않아도 누추한 화장실을 사용해선 안 된다고 자발적으로 생각하는 흐름이 있는 것이다. 윗사람이 궁핍에 처하는 비결을 배우지 못해서 만들어진 잘못된 흐름이다. 그렇다고 욕만 해서 될 일은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과연 풍부에 처하는 비결은 배웠나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 수련회는 시골 교회 하나 빌려서 마루 예배당 양쪽으로 남녀 나눠서 함께 자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다들 그냥 입던 옷 입고 잤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어 다른 교회의 겨울 수련회를 따라갔는데 유스호스텔을 빌려서 했다. 시설 좋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저녁이 되어 숙소를 다 정하고 보니 남들은 모두 잠자기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는 것이었다. ‘나는 갈아입을 속옷만 가지고 왔는데…. 아, 저녁이 되고 실내에서는 잠옷이 아니라도 갈아입을 옷이 있을 수 있구나. 게다가 남녀 같이 있지 않는 각방에서 자니 이렇게 갈아입을 환경이 조성되는구나.’ 비슷한 시점에 자가용이 가득한 어느 교회를 들어가며 교인들의 복장과 품위의 차이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기도 했다. 30년이 지난 옛 추억이지만 어쨌든 그때엔 풍부에 처하는 문화충격이었다.
우리 모두 비천에 처하는 비결도 배우고 풍부에 처하는 비결도 배우자. 전에 어떤 분의 인터뷰 기사에서 돈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고민은 많이 해봤지만 돈이 갑자기 많아지면 어쩌나 하는 고민은 안 해봐서 갑작스러운 부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소회를 읽은 적이 있다. 정말 그러하다. 비천도 풍부도 모두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어설프게 번 돈으로 목을 꼿꼿이 세우는 일도 없을 것이고, 나이 먹어 서서히 여러 가지가 하나 둘 사라지는 상황에서 우울의 심연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최의헌<연세로뎀정신과의원>
[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입력 2014-12-20 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