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온 지 한 달쯤 됐을 때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외과 조수 자리를 구했다. 어렵사리 구한 외과 조수 자리였지만 막상 병원에서 조수가 되고 보니 생각보다 대우가 형편없었다. 특히 닥터 정이 아닌 미스터 정이라고 부르는데 몹시 실망했다. 더군다나 병원 규정상 조수는 의사 식당에서 밥을 먹지 못했다.
“나는 내년에 수련의 과정에 들어가기까지 잠시 조수로 일할 뿐입니다.” 누가 묻지 않은 말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들이 귀 기울일 만큼 말을 잘하지도 못했다.
외롭고 서러운 나날이 이어졌다. 뉴욕에서 시작한 일반외과 수련을 마치고 텍사스 심장센터의 혈관외과 수련을 받으러 휴스턴으로 갔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그린 미래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아서 마냥 들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이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는 게 아닌가. 일반외과 수련을 받고 있을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가 모교의 과장 선생님을 만나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그의 권유로 혈관외과 훈련을 받으러 텍사스 심장센터로 온 것인데, 그 사이 모교의 과장 선생님이 바뀌는 바람에 고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막해진 것이었다. 하루 빨리 이 외로운 미국생활을 창산하기를 손꼽던 나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영어도 겨우 먹고사는 데 지장없을 정도만 배운 터였다.
‘한 번 엽전은 평생 엽전’이란 말처럼 나는 한국에서 30년을 살면서 입맛도, 생각도 굳을 대로 굳어진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 아닌가. 미국인으로 살기엔 너무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고국의 사회적인 이슈들에 감 놔라 배 놔라 메아리도 없는 훈수를 두며 분노하고 감격하던 나였다. 심지어 고국의 고추 값, 배추 값까지 꿰차고 있을 만큼 나는 내가 떠나온 고향에 관심이 많았고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그리운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니 밤에 잠을 이루기 어려울 만큼 낙심이 컸다. 나는 대학 시절 ‘똘배문학회’를 만들어 토요일 오후면 친구들과 술집에 모여 앉아 문학을 얘기하고 사회 정치를 논하곤 했다. 술을 무척 좋아했지만 단 한 번도 혼자 술을 먹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선 상처받은 자존심을 부여안고 혼자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들더니 도무지 이 질문이 귓가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닥터 정으로 살다가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이 무인도 같은 곳에 버려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그 무렵 아내는 옆집에 사는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서울에 있을 때 가끔 교회나 성당에 들른 적은 있지만 믿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얼마 후 아내가 같이 교회에 가자고 권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학창시절 ‘기독교는 집단 정신질환의 한 현상인가?’라는 제목으로 열띤 토론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 내가 어떻게 교회를 다닐 수 있겠는가. 대신 자동차를 구입하고부터는 운전을 해서 아내를 교회까지 데려다주고 끝나면 데려오곤 했다. 어쩌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오기가 번거롭기도 하고, 아내의 간청도 있고 해서 마지못해 교회에 들어가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 이방인의 나라 미국보다 더 낯설고 이절적인 기분이 들었다. 눈물을 흘리며 찬양하고 두 손을 들고 “주여, 주여” 부르짖는 모습은 정말이지 집단 정신병자들 같았다. 교인들은 없는 신을 있다고 우기며 예배하는 나약하고 무책임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다 문득 만일 신이 있다면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 순간 내 모습에 깜짝 놀라고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이상 예배당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정수영 (2) 낯선 미국서의 혼돈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입력 2014-12-18 0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