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수영 (1) 전쟁터 같은 수술실이 내겐 특별한 예배처소

입력 2014-12-17 03:57 수정 2014-12-17 16:52
최근 일시 귀국한 정수영 박사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지난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수술대 위에는 의식이 없는 환자가 누워 있다. 푸른색 수술복을 입은 의사들이 환자의 상태를 살피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마취제가 혈관을 타고 들어가면 메스를 잡은 의사는 촌각을 다투며 환자의 가슴을 연다. 날카로운 메스를 든 의사의 눈과 손은 사람의 손 같지 않다. 죽어가는 한 영혼의 심장을 뛰게 하기 위해 환부를 자르며 도려내고 꿰맨다.”

TV드라마에서 종종 연출되는 심장 수술실 풍경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실제 수술실은 칼을 잡아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긴장감과 공포감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나는 ‘인간 재봉틀’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심장외과 의사다. 현재 미국 플로리다주 ‘오칼라심장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에게 수술실은 ‘특별한 예배장소’이다. 매순간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곧 거룩한 처소이기 때문이다. 전쟁터 같은 수술실에는 긴박함 속에서도 고요와 평화가 흐른다.

1949년 대구시 두산동에서 4남 3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시라고는 하지만 시골이나 다름없는 변두리였다. 6·25한국전쟁은 금수강산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우리들 전후세대들의 마음에 남기고 간 절망과 이별, 상실의 아픔은 강산이 메마른 것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한 때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동네 친구의 절반이 학업을 중단했다. 친구 중 대학을 간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을 경험했다. 하늘같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의사도 무슨 병인지 모른다고 했다. 졸지에 청상과부가 된 어머님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큰형마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다.

“아, 인생은 참, 슬프고 쓸쓸한 것이구나!”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늘 아버님과 먼저 떠나보낸 아들을 생각하며 통곡하셨다. 나는 책가방을 던져놓고 뒷산에 올라가 대구 수성 들판을 내려다보고 수심에 젖어들었다. 어머님에게 이렇게 큰 슬픔을 안긴 이유는 뭘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돼 진로 문제를 고민하던 어느 날이었다. 한겨울 아침 등굣길에 타고 가던 버스가 신호등에 서 있는 동안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는데 리어카에 솜이불을 덮어쓴 환자와 보호자가 병원 문이 열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습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의료 혜택도 못 받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큰형이 생각이 나서였다. “내가 의사라면 좋겠는데….” 그날 등굣길의 풍경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각인돼 있다.

전쟁 직후의 시대 상황과 슬픈 가족사 때문이었을까. 나는 의과대에 입학했지만 기독교를 부정하며 허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철학에 빠져들었다. 신촌 거리를 방황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카뮈, 사르트르, 니체의 철학을 탐구하며 수없는 날을 방황하면서 보냈다. 문학을 한답시고 문우들과 술통을 끼고 살았다.

3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1978년 10월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 5년간 수련 과정을 잘 마친 뒤 모교로 돌아가서 교수가 되리라는 청운의 꿈에 부풀었다. 주머니엔 단돈 700달러와 미국 의사자격증밖에 없었지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의기양양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약력=1949년 대구 출생. 연세대 의과대학 졸업. 세계누가선교회 회장, 컴패션 얼라이언스 이사장 역임. 현재 미주한인의료선교협회(KAMHC) 회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에비슨 인터내셔널 스칼라십 이사, 한국심장재단 북한위원회 이사. 자마(JAMA)와 코스타(KOSTA) 강사. 저서 심장이 뛴다(두란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