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정부와 의회가 있는 워싱턴DC에는 많은 한국 ‘손님’들이 찾아온다. 주로 공무원과 외교안보 전공 연구자,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이다. 최근에는 ‘잠룡’으로 불리는 서울시와 경기도 등 광역지방자치단체의 전·현직 단체장들도 워싱턴을 방문해 특파원들을 만났다.
일부 정치인의 워싱턴 방문 소감 중 가장 의아스러운 것이 “미국 정치 시스템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는 부분이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뭘 본받아야 하지?’이다.
최근 미 의회의 격렬한 당파 간 대립과 파행 운영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이런 상황이 일시적인 ‘일탈’ 정도로 여겨지는 듯하다. 여기에는 미국 헌법으로 대표되는 튼튼한 헌정주의와 효율적인 제도가 결국에는 이를 교정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하지만 미국 지식층을 넘어 일반인들에게도 미국 헌법을 중심으로 제도 전반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2012년 저명한 의회 전문학자인 토마스 만(브루킹스연구소)·노먼 오른스타인(미국기업연구소) 박사가 함께 지은 ‘보기보다 훨씬 심각한 미국 정치(It’s Even Worse Than It Looks)’라는 책이 화제가 됐다. 이들은 보수(공화당)와 진보(민주당)로 확연히 갈라지면서 미국 정치에서 중간이 사라졌고, 사실과 상식도 인정하지 않는 강경파 ‘티파티’가 공화당을 견인하면서 미 의회가 다수결도 통하지 않는 ‘고장 난(dysfunctional) 제도’가 됐다고 진단한다. 타협의 존중이라는 미국 정치 전통이 사라져 18세기 현실에 기초한 ‘낡은’ 미 헌법의 문제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됐지만 미국 정치의 양극화와 비효율이 헌법 자체의 결함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크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2월 별세한 민주주의론의 대가 로버트 달 전 예일대 교수가 2001년 ‘미국 헌법은 얼마나 민주적인가(How Democratic is The American Constitution)’라는 책에서 소상히 설명했다.
그는 연방제, 양원제, 사법부의 법률심사권, 대통령 선거인단 등의 조항이 민주주의와 헌정체제의 이상과 크게 어긋난다고 비판한다. 특히 개정을 지나치게 어렵게 한 점이 미 헌법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지적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최근 펴낸 ‘정치적 질서와 정치적 쇠퇴(Political Order and Political Decay)’에서 기능부전에 빠진 미국 제도에 대한 심원한 분석을 제공한다. 1991년 저서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궁극적 승리를 선언했던 후쿠야마로서는 20여년 만의 놀라운 ‘반전’이다.
그는 미국이 삼권분립이라는 근대 민주정의 이상적인 모델로 보이지만 실제 미국은 의회와 사법부에 의해 행정부의 기능과 정당한 몫이 탈취당한 나라라고 주장한다. 미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 등이 가졌던 공권력에 대한 과도한 공포가 행정부와 관료가 행사해야 할 행정력의 상당부분이 소송과 판결을 통해 결정되는 ‘행정의 사법화’로 이어졌다.
아울러 시민적 자유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기업과 부유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집단(interest group)의 입법과정에 대한 과도한 영향력 행사가 합법화됐다.
이런 두 결함이 지난 수십년간 경제적 불평등, 부의 집중현상과 결합해 병증이 급속히 악화됐다. 이에 따라 외부의 충격 등으로 진정한 개혁을 강제할 요인이 없는 한 미국 제도의 자체 회복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후쿠야마 교수의 암울한 전망이다. 여전히 미국 대통령제에 대한 선호가 강한 우리 현실에서 미국인들의 이러한 자가진단은 눈여겨볼 만하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
[특파원 코너-배병우] 커지는 미국제도 위기론
입력 2014-12-15 0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