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칼럼] ‘나쁜 사람들’이 판치는 나라

입력 2014-12-15 02:50

여권 사람들 가운데 누가 권력자인지를 가늠하는 한 가지 척도가 있다. 누구의 의견이 대통령 입을 통해 나오는지 헤아려보면 된다는 게 그것이다. 빈도수가 높을수록 그의 힘이 강하다는 얘기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는 뜻이기도 하고, 대통령의 판단을 좌우하는 위치에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 붙여지는 별칭이 핵심실세, 복심(腹心), 2인자 등이다. 오래전부터 정치권에 나도는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8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의 대면보고 자리에서 문체부 국·과장 이름을 대며 “나쁜 사람들”이라고 했다. 당사자들은 경질됐다. 그 배경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당시 문체부 장관의 주장이 다른 만큼 논외로 치더라도 대통령이 국·과장을 거명하며 질책했다는 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청와대는 그들이 체육계 적폐 해소에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 그들이 무능했을 수 있다. 하지만 국가적으로 훨씬 중요한 방산비리나 원전비리와 관련해 대통령이 국방부나 방위사업청, 산업통상자원부나 한국수력원자력의 담당 간부들을 지명해 꾸짖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래서 대통령 머리에 ‘나쁜 사람들’을 각인시킨 누군가가 존재할 개연성이 매우 커 보인다. 누구일까를 놓고 요즘 ‘비선 실세’로 불리는 정윤회씨 또는 그의 아내일 것이라는 보도까지 나온 상황이지만 청와대는 부인하고 있어 속단하기 어렵다. 여하튼 대통령에게 ‘나쁜 사람들’을 발언하도록 만든 사람 역시 ‘나쁜 사람’일 듯하다. 대통령이 격에 맞지 않는 일을 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대통령에게 부담을 더 지웠고, 파문을 확산시킨 탓이다.

‘정윤회 감찰 보고서’ 사태를 계기로 드러난 ‘나쁜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그들의 ‘가벼운 입’으로 인해 권력 암투설 등 온갖 의혹들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나라야 어찌 되든, 국정이 어찌 되든 혼자 살기 위해 저마다 몸부림치는 형국이다.

측근이라는 사람이 이번 파동의 근본 원인이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과 이른바 ‘문고리 권력 3인방’ 사이의 갈등에 있으며 자신은 피해자라고 떠들어대질 않나, ‘찌라시’ 수준의 내용을 청와대 공식 문건으로 만든 뒤 이 문건이 외부로 유출되자 뒤늦게 내용의 진위 여부는 물론 유출의 책임소재를 놓고 청와대 전현직 근무자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티격태격하질 않나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민감한 정보를 담당하는 이들이 기업이나 언론에 정보를 줄줄 흘리질 않나, 한 부처의 전직 장관과 현직 차관이 인사권과 관련해 전직 장관이 전적으로 행사했다느니 차관이 청와대 비서관과 한통속이 돼 주물렀다느니 하면서 입씨름하질 않나 해괴한 짓거리들이 횡행하고 있다. 이런 수준 미달의 사람들이 청와대나 정부부처에서 일하고 있거나 일했다니 “박 대통령의 인사는 낙제점”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재확인되는 대목이다.

현재까지 ‘BH(청와대) 목장의 혈투’에 등장하는 이들은 20여명이다. 검찰 수사를 통해 아마도 누가 더 나쁜지 서열이 매겨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언행으로 볼 때 형사처벌을 받든, 면죄부를 받든 그들 모두 ‘나쁜 사람들’ 범주에 속하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박 대통령은 비선 실세의 국정개입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총리나 장관보다 ‘문고리 권력 3인방’이 세간의 관심을 더 받는 점부터 비정상이다. “3인방은 심부름꾼일 뿐”이라는 대통령의 외침도 되레 ‘3인방은 역시 실세’라는 인식을 고착시키는 역작용을 낳고 있다. 역대 정권을 돌아보면 끝이 안 좋았던 실세들은 대부분 대통령마저 속이며 호가호위했다. 학연과 지연 그리고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 어떻게 해서든 실세에게 줄을 대 사익을 챙기려는 나쁜 사람들도 상존했다. 최대 피해자는 대통령이었다. 부끄러운 역사다. 이번에는 다를까. 박 대통령의 자신감이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회의적이다.

김진홍 수석논설위원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