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한 치 앞도 못 내다본 헛구호들…

입력 2014-12-12 03:55
간단한 듯하지만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 정부는 명쾌한 표어로 만들어 개개인의 실천을 강조하지만 잘못된 방향 설정 탓에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우는 경우도 많다. 이런 문제들엔 나라의 존망을 결정하거나 한 산업의 성쇠가 달려 있기도 하다. 쉽게 생각하면 개개인의 간단한 실천으로 해결될 문제이기도 하지만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국가적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좀처럼 풀리지 않는 난제들이다. 이런 문제들을 풀기 위해 정부는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놨지만 대부분은 실패로 돌아갔다. 30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아쉬운 것이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1980년대 인구정책 표어)=2750년 대한민국은 소멸된다. 지금의 저출산 기조가 지속된다면 말이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정부는 ‘가족계획’이라는 미명으로 자녀 덜 낳기운동을 펼쳤다. 그 결과 오늘의 대한민국은 생산인력 부족을 우려하는 상황에 빠졌다. 평균수명이 늘어나지만 아이는 낳지 않는 까닭에 ‘노인들의 나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여성 1인당 평균 평생 몇 명의 자녀를 낳는지를 나타내는 합계출산율은 1970년 4.5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강력한 출산억제 정책의 결과로 1983년 2.1로 떨어진 뒤 지속적인 하락세를 나타냈다. 정부는 2000년대 들어 부랴부랴 출산장려 정책으로 돌아섰지만 2005년 1.1로 최저점을 찍었다. 정부는 2005년 사회문화정책관계장관회의에서 우리나라의 적정 인구가 4600만∼5100만명이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선 합계출산율을 1.8∼2.4로 유지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 수치는 좀처럼 오르지 않고 1.2∼1.3 수준을 오르내리고 있다. 산술적으로 젊은이들이 아이를 한 명씩만 더 낳으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지만 현실에선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다. 정부는 여러 가지 출산장려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일상을 꾸려나가기도 벅찬 젊은이들에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게 고통스럽다. 정부가 지원하는 양육수당 20만원으로는 한 달 기저귀값, 분유값도 모자란다. 험악한 사건사고가 난무하고 영아 시절부터 사교육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 아이를 내놓기도 두렵다.

◇하루 한 끼 분식하면 국민체위 향상되고 나라살림 절약된다(1970년대 혼식 장려 정책 표어)=한때는 쌀이 부족해 혼식을 장려하기도 했지만 농업 기술의 발달로 쌀 부족 걱정이 해소된 1990년대 이후 농정 당국은 남아도는 쌀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 쌀 농업 분야에서 농정 당국의 가장 큰 고민은 ‘남아도는 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와 ‘어떻게 하면 쌀이 남아돌지 않게 할까’였다. 정부는 막걸리 등 쌀 가공산업을 육성하고 대규모 기계농을 육성하면서 소농들을 정리하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올 한 해 농업 분야의 가장 큰 이슈는 쌀시장 개방이었다. 결국 정부는 관세율을 높게 매기면 별 걱정이 없다며 513%의 관세율을 책정해 쌀 수입을 자유화하겠다고 결정했다. 이에 대한 농민들의 원초적인 불안감은 “가뜩이나 쌀이 남아도는데 저가의 수입쌀이 들어오면 버텨낼 재간이 없다”는 점이다.

쌀 생산량은 1988년 사상 최대치인 605만t을 기록한 뒤 지속적으로 내리막을 걷고 있다. 올해 쌀 생산량은 424만t이다. 국민 식생활 변화에 따라 쌀 소비량이 줄기 때문이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도 1970년 136.4㎏으로 정점을 찍은 뒤 급격히 줄어 지난해엔 67.2㎏에 불과했다.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절반 이상 소비량이 감소한 것이다.

밥쌀용 쌀 소비량은 지난해 1인당 66㎏에 그쳤다. 1999년(94.8㎏)의 3분의 2 수준이다. 바꿔 말하면 국민 모두가 하루에 한 그릇씩 밥을 더 먹으면 1999년 생산량인 526만t 정도를 소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정부는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침 밥 먹기 캠페인’ 정도를 펼치고 있지만 이마저 구체성이 떨어진다. 출퇴근 시간에 통행량이 많은 지하철역 등에서 삼각김밥을 나눠주는 일회성 행사를 펼치는 식이다.

◇유연근무는 공직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사기를 진작시킨다(2010년 행정안전부 유연근무제 도입)=서울 양천구 신정동에서 강남구 역삼동으로 출퇴근하는 김정우(33)씨는 오늘도 녹초가 됐다. 2호선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데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영하의 날씨에 두꺼운 외투를 입고 지하철을 타는 날이면 내릴 때는 온몸이 땀범벅이 될 때가 많다. 출근시간대 지하철 객실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승객으로 가득 차기 때문이다. 김씨는 혼잡 시간대 출근이 이만저만한 스트레스가 아니라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한 시간 일찍 또는 늦게 출근길에 오르면 혼잡을 피할 수 있다. 김씨는 “모든 근로자들을 3개조로 나눠 한 시간 간격으로 출퇴근하면 혼잡도가 3분의 1로 줄어들 텐데…”라고 생각한다.

2010년 행정안전부는 5월부터 2개월 동안 28개 기관 1425명의 공무원을 대상으로 ‘유연근무제’를 실시했다. 유연근무제는 오전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식의 획일화된 공무원 근무 형태를 개인별·업무별·기관별 특성에 맞게 자유롭게 조정해 근무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이다. 재택·원격근무, 시차 출퇴근, 시간제근무 등이 있다. 정부는 공직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고 공무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이 제도를 도입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해관계자가 많은 공직의 특성 탓에 모두가 일하는 시간에 업무를 봐야 협조가 잘되기 때문이다.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살인적인 업무량 탓에 “낮에는 민원전화를 받고 밤이 돼야 고유업무를 진행시킬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유연근무제는 언감생심이라는 반응이 많다.

정부는 지난해 정부업무평가에 유연근무 활성화 평가비중을 3점에서 5점으로 높이고 유연근무제를 월평균 1회 이상 이용 비율이 기관 전체 인원의 10% 이상이 되도록 자율목표 최소기준을 설정했다. 공무원 개인이 자발적으로 유연근무제를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방증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48개 중앙행정기관 12만5000명 중 유연근무제를 월평균 1회 이상 사용한 공무원은 1만8443명(14.8%)에 그쳤다.

선정수 기자 j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