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한살 독재자 ‘숙청’으로 홀로서기

입력 2014-12-12 02:55

‘장성택 처형 후 1년’ 동안 북한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를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재구성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예상됐던 정치적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현재 김 제1비서의 권력 기반이 비교적 안정됐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장성택은 지난해 12월 12일 국가안전보위부로부터 ‘국가전복 음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받은 뒤 처형됐다. 구체적인 혐의로 김 제1비서의 권위에 도전한 행위, 내각 무력화, 사회기강 해이, 개인비리 등이 나열됐다. 정치·경제 권력의 사적인 독점 및 부패 혐의가 ‘처단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정부는 장성택 축출 이후 북한에서 그가 누렸던 권력과 부의 재분배가 현재까지 진행 중이라고 보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11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지난 1년간 북한의 지각변동에 대해 “‘장성택 그림자 지우기’, ‘부 축적 수단의 재분배’, ‘부패의 구조화’ 등이 정치·경제·사회 제분야에서 일어났다”고 요약했다.

◇당·군·정 권력구도 재편…자수성가 신진 세력 급부상=‘장성택 물빼기’ 작업 이후 북한 최상위 권력집단은 ‘김정은 색깔’로 채워졌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정치적 배경이 확실치 않은 자수성가형 신진 세력의 등장이다.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조연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장성택 처형을 논의한 ‘삼지연 회동’ 주도 인물이다. 한광상 노동당 재정경리부장, 서홍찬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변인선 제1부 총참모장 등도 김 제1비서가 발탁한 신진 세력으로 지목된다.

반면 ‘장성택 라인’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문경덕 평양시당 책임비서, 이병삼 인민내무군 정치국장, 이영수 당 근로단체 비서 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난 9월에도 20명, 10월 10명 등이 ‘반당 종파행위’ 등 혐의로 처형됐다. 장성택 잔재 청산이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아버지 시대’ 실세들도 실각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직후 운구차를 수행한 ‘7명 인사’ 중 장성택을 비롯해 이영호 전 인민군 총참모장 등 군·당·정 핵심 인사 5명이 자취를 감췄다. 김기남 노동당 선전선동 비서,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 2명만 남아 있다. 지난 4월 치른 제13기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전체 대의원의 55%가 물갈이됐다.

◇부패 구조화된 ‘정경유착’ 사회=통일부 관계자는 장성택 숙청의 다른 배경으로 ‘부의 독점’을 거론했다. 장성택이 54부를 중심으로 수백개의 계열사를 보유했는데도 인수·합병을 멈추지 않자 불안감을 느낀 반대파가 숙청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점 현상은 처형 이후 해소되지 않았고, 권력을 대체한 집단이 장성택 몫을 빼앗아 나눠먹는 수준에 그쳤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처형 이후 북한 사회의 변화에 대해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집단이 부의 축적 수단을 쟁취하고 그 밑에 수많은 당국자가 들러붙는 등 부패가 구조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북·중 관계 악화, 2차 권력투쟁 가능성=각종 이권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권력다툼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김정은 체제에는 잠재적 불안요인인 셈이다. 김 제1비서가 다리 수술로 40여일 대외 활동을 중단한 뒤 혈족인 ‘백두혈통’과 ‘빨치산 후예’ 등 최측근 인사를 다시 권력 전면에 포진시킨 것도 불안감을 반영한 것이란 해석이다. 유일한 여동생인 김여정이 최근 노동당 부부장에 임명됐고, 빨치산 세대 2세인 오일정은 노동당 군사부장에 올랐다.

친중 인사였던 장성택이 처형됨에 따라 북·중 관계는 얼어붙었다. 양국 경협 책임자의 실각으로 황금평 특수 사업이 개점휴업 상태다. 정치·군사 분야도 타격을 입었다. 정치 분야 교류의 경우 ‘김정일-후진타오 시절’ 1년에 45회 교류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1년에 5∼6차례 실시하던 군사교류 역시 전무하다.

유동근 기자 dk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