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덕규 시인의 시를 가수 조성모가 리메이크해 부른 ‘가시나무’란 복음송이 인기가 높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당신의 쉴 곳 없네/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당신의 편할 곳 없네’ 이 노래의 가사뿐 아니라, 조성모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듯하다.
이 노래를 듣는 이들은 자신의 내면 상태를 진솔하게 보게 된다. 노래를 들으며 진실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자신의 바람대로 일이 되어가지 않는 것에 동감하게 된다. 마치 사도 바울 선생이 탄식했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 말씀처럼 육체를 가진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고민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육신의 한계를 쉽게 고백하고 다시 그런 상태에 빠지기를 반복하게 된다.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자조적인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주 앞에 진실하게 서려고 노력하면서도, 이러한 인간적 노력의 한계를 부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마르틴 루터가 그랬고, 많은 신앙의 위대한 선배들이 그랬다. 테레사 수녀 같은 큰 인물도 노벨 평화상을 받기 얼마 전, 자신의 영성지도자에게 “나는 요즘도 우울과 회의에 빠져 고통을 겪곤 한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영성 대가도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한다. 하물며 평범한 보통 신자들은 어떻게 주님을 조금씩이라도 닮아갈 수 있을까.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은 나’를 줄이고 주의 사랑으로 채우는 방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생긴 상처의 쓴 뿌리가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화와 질투가 불쑥불쑥 올라와서 견디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은 희망으로 다가온다. 그는 모든 성스러운 행위 중 기도를 으뜸이며 영성생활의 본질로 꼽는다. 기도는 자신과 하나님, 자신과 세계를 연결한다. 물론 인간은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기도에 동등하게 응답하지는 않으신다. 시내산 계시가 매일 일어나지 않듯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셀은 “네가 기도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강조한다. 이런 기억 속에서 우리는 매일 기도하며 나갈 수 있다.
헤셀은 또 기도를 ‘대화’보다 ‘잠기기(immersion)’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기도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자비의 물에 접촉하고 잠기는 경험이다. 신자는 기도로 하나님의 자비의 강물에 들어갔다가 나옴으로 주님의 자비를 덧입는 정화의 행위를 반복한다. 우리는 자비의 강물에 잠길 때마다 하나님께 정직해지고 본연의 자세를 회복하며 갱신하게 된다. 예수께서 세례 후 강에서 나올 때 임하였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말씀의 은총이 내게도 임할 것이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던’ 마음도 넉넉히 승리하시는 주님의 임재와 돌봄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조금씩 맛볼 수 있다. 인간은 육신을 보며 좌절할 수밖에 없지만, 주님의 평강과 자비로 오늘도 새롭게 일어서고 희망 속에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권명수 교수(한신대 목회상담)
[시온의 소리-권명수] 하나님 자비의 강물에 잠기기
입력 2014-12-12 0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