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을 갈라놓은 군사분계선(MDL·Military Demarcation Line). 선명하게 선이 그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철조망도 거의 없다. 드문드문 노란색 푯말이 MDL임을 알려줄 뿐이다. 잡초가 우거지고 인적이 드문 MDL은 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최근 그 긴장감은 숨을 멎게 할 듯 높아지고 있다. 대북전단 때문이다.
지난 10월 10일 우리 민간단체들이 경기도 연천 지역에서 대북전단을 커다란 풍선에 매달아 띄우자 북한군이 고사총을 발사했다. 곧바로 우리 측 대응사격이 이뤄졌고 남북 간 사격전이 벌어졌다. 군사 전문가들은 앞으로 MDL 인근의 긴장감은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남측 민간단체들은 대북전단 살포를 계속할 태세이고, 북한은 “기구 조준타격은 물론 본거지, 배후 지휘세력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어서다. 북한이 국지도발을 해온다면 MDL 인근 지역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정전협정으로 그어진 MDL=MDL은 유엔군과 북한이 6·25전쟁 정전협정을 맺으며 표시한 선이다. 이 선 설정을 놓고 북한과 유엔군 측은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북한은 전쟁 이전의 분단선인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고 주장했다. 유엔군 측은 “6·25전쟁으로 38선은 의미가 없어졌다”며 현재 양쪽 군이 대치 중인 접촉선을 경계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맞섰다.
1953년 7월 27일 양측은 당시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MDL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2㎞씩 비무장지대(DMZ)도 조성키로 했다. 양측은 서쪽 임진강 강변에 ‘0001호’를 시작으로 한반도 허리를 질러서 동해안에 마지막 1292호까지 248㎞(155마일)에 1292개의 푯말을 박았다.
직선일 때는 500m, 굴곡선일 때는 300m를 넘지 않도록 푯말을 세웠다. 푯말은 가로 90㎝, 세로 45㎝ 크기의 노란색 철판에 검은색 글씨로 남측에서는 ‘군사분계선’과 영어 명칭을 썼고, 북측에서는 한자로 ‘軍事分界線(군사분계선)’이라 썼다. 696개는 유엔군이 관리하고 596개는 중국·북한이 책임지기로 했다. 1954년 9월 푯말 세우기는 마무리됐다.
하지만 공동경비구역(JSA)에는 군사분계선이 없었다. 남쪽 구역에 북측 초소가 있고 북한군과 유엔군이 서로 오갔다. 하지만 1976년 북한군이 미군 2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미루나무 도끼사건’ 이후 이곳에도 푯말이 들어섰다. 이곳 푯말은 노란색 철판이 아닌 하얀색 철판이다.
푯말들은 60여년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글씨가 지워지고 녹이 슬어 부서지기도 했다. 1961년 유엔사는 북한이 관할하는 푯말 65개가 손실돼 보이지 않는다고 통보하기도 했다. 1963년에는 푯말 ‘0001호’에서 ‘0187호’까지의 위치를 공동 조사하자고 제의하기도 했지만 북측은 응하지 않았다. 1969년 3월과 1973년 3월 우리 군이 푯말을 교체하고 주변 정리 작업을 하다 북한군의 총격을 받았다. 이후 푯말 정비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북한은 2009년 우리 측이 푯말을 이전했다고 생떼를 쓰기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푯말은 백수십개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북전단 살포로 총격 사건이 벌어진 뒤 북한군은 연천과 철원 지역 등 MDL 인근에서 푯말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군은 전단 살포에 대비해 정확한 MDL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군은 이번 기회에 푯말 정비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고 북한군과의 협의를 유엔사에 요청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유엔사는 남북한 모두에 이 사안을 협의하자는 서한을 보냈다”며 “하지만 북한은 서한을 수령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MDL을 둘러싼 사건들=MDL은 군사분계선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남북대화 대표, 기자, 고향방문단과 남북교류협력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당국의 허가를 받아 넘기도 했다. 하지만 무단으로 MDL을 넘다가 문제가 된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9년 8월 당시 대학생이었던 새정치민주연합 임수경 의원이 북한을 방문하고 판문점 쪽 MDL을 넘어 돌아왔다. 유엔사는 북측에 보낸 전통문에서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1998년 6월에는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소떼를 몰고 판문점 MDL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다. 2007년 2월 2차 남북 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걸어서 MDL을 넘은 뒤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이용해 평양에 갔다.
하지만 MDL 인근에서는 종종 사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1984년 평양 주재 구 소련 대사관 소속 외교관이 판문점 관광 중 기습적으로 MDL을 넘어 귀순하자 북한군이 따라 내려와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 1명과 북한군 3명이 숨졌다. 1999년 7월 강원도 김화 지역에서 북한군 7명이 MDL을 70m 정도 넘어와 군이 경고방송과 경고사격을 하자 북한이 대응사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2006년 5월에도 강원도 화천 북방에서 북한군 2명이 MDL을 20∼30m 넘어와 우리 군이 경고사격을 가했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
[긴장의 군사분계선 (MDL)] 냉전의 철책 155마일
입력 2014-12-27 0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