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12월 청나라 태종이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입했다.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인조 임금은 겁에 질려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경복궁 종각 수구문 살곶이다리 송파나루 길을 통해서였다. 영의정 김류를 비롯한 500여명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떨며 뒤따랐다. 후금이 명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며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는데도 조선은 대명(大明·명나라)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조선 조정의 사대주의와 세도정치 때문이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그 치욕의 현장을 작가적 상상력을 통해 불편할 정도로 보여주었다. 백성을 위하지 않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백성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나라를 위해 염원하고 기도한다.
2014년 12월 7일 대설. 주일이기도 했다. 눈은 오지 않았다. 다만 1636년 12월처럼 삭풍이 몰아쳤다.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시내버스가 느린 속도로 산길을 올랐다. 초목의 잎사귀가 모두 져 산등성마루 바닥조차 한눈에 들어왔다.
그해 겨울, 남한산성엔 1만2000여명의 병사가 있었다. 1년 정도 버틸 식량만 비축해 놨어도 유리한 지형상 싸워볼 만했다. 하지만 50일치 군량미밖에 없다는 것을 안 청군은 성을 에워싸고 고립시켰다. 인조는 청에 삼궤구고두한 후 항복했다. 이 남한산성은 지난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산성터널을 빠져나오자 예배당이 있었다
버스가 산성 남문 쪽 산성터널을 지나면 산성마을이 분지형태로 펼쳐진다. 마치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에 나오는 첫 문장 느낌이다. ‘도시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시간여행자가 되는 것이다.
버스가 산성로터리 정류장에서 등산객을 쏟아냈다. 형형색색 등산복과 스틱을 갖춘 이들은 성벽 길을 따라 남한산, 청량산 꼭대기로 향했다.
이 옛 마을엔 청기와 지붕을 인 교회가 있다. 로터리에서 북문을 바라보고 오른쪽 200m만 가면 길옆에 ‘남한산성교회’가 우뚝하다.
교회 옆엔 남한산초등학교가 자리했다. 학교와 교회 사이엔 연무관(演武館)이 있다. 1624년 축성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팔작지붕의 연무관은 문·무과 시험을 보는 시험 장소였다. 또 무기 시연은 물론 군사훈련 장소로도 쓰였다.
연무관은 교회와 학교 건물을 내려다보는 위치다. 연무관 마당 앞 안내판에 새겨진 1900년대 초 찍은 흑백사진은 ‘아름다운 조선’의 한 장면이다. 연무관 좌우로 회화나무인 듯한 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그 앞을 흰 두루마기에 갓 쓴 이가 걸어가고 있다. 그이 뒤로 여자아이 셋이 옹기종기 모여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 앞으로 누렁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다.
이 한 장의 사진 속 왼쪽은 학교, 오른쪽은 교회 건물이 들어섰다. 사진 오른쪽엔 한옥이 보이는데 바로 지금의 교회 자리다.
승영사찰(僧營寺刹) 산성에 교회가 서다
‘직할시’ 광주유수부는 일제에 의해 쇠락했다. 부청(府廳) 등이 일제에 의해 불탔고 산성은 폐허가 됐다. 1917년엔 산성리에 있던 군청마저 경안리로 이전됐다. 그 경안리가 발전하면서 광주지역 첫 교회 광주교회가 설립됐다.
1921년 5월 5일. 광주교회 전도사 박제상은 산성리에 들어와 복음을 전했다. 산성 내 사찰만 공식적으로 7개였다. 그런데 이곳에 ‘서양 귀신’이라니…. 산성마을 사람들은 “야소에 미친 사람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남한산성교회가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전쟁 등을 넘기며 93년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주일 최영준(42) 목사는 ‘롯의 처를 기억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최 목사는 설교를 마치고 교회소식을 전하며 “강원도 산간 지방에 눈이 온답니다. 그러면 우리도 눈 옵니다. 눈과 추위가 만나지 않아야 하는데요”라며 교인의 안전과 건강을 염려했다. 그만큼 산간마을 교회라는 얘기다. 최 목사는 또 교회소식을 통해 크리스마스이브 새벽송 도는 일정을 공지했다. 오는 24일 산성마을에 눈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산성은 애초 불력의 땅이다. 1624년 총융청 총융사 이서 장군이 한양을 지키기 위해 축성하면서 인근 100㎞ 이내 승려 3000여명을 모아 벽암대사를 도총섭으로 임명하고 7개의 사찰 건립을 허가하겠다고 밝혔다. 숭유억불을 건국이념으로 한 조선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승영사찰(僧營寺刹)이므로 군·종이 연합해 축성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지금도 망월사, 장경사 등 산성 내 유독 많은 사찰이 있는 이유다.
19세기 전반 무렵에는 천주교 박해 당시 한강 이남 천주교 신자 300여명이 남한산성 감옥에 투옥됐다가 순교했다. 지금도 남한산성교회 건너편에 순교자현양비가 아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또 서울 청계천 빈민 등을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 구시가)로 몰아내면서 대단지가 가까운 산성 중심으로 미신이 성행했다. 이런 틈을 이단 종파가 산성 내에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산길 걸어 3시간… 목회자 부임 꺼려
따라서 산성리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통이다.
“어머니는 산성 밖 검복리에서 열아홉에 시집오신 분이셨어요. 아버지는 산성 내 부잣집에서 입양아들처럼 사셨지요. 그 어머니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셨지요. 저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찬송을 듣고 자랐어요. 당시만 해도 겨우 세 집 정도가 섬겼어요. 변변한 예배당이 없어 이집 저집 떠돌며 신앙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평생 산성마을을 떠난 적 없이 살아온 곽차랑(72) 명예장로의 기억이다. 그의 어머니 오창순 권사(2004년 작고)는 남한산성교회의 오늘을 있게 한 몇 안 되는 헌신자다. 곽 장로의 어머니 얘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유옥동(61·한정식 남한장 대표) 권사는 “어느 날 오 권사님이 ‘(교회 건축으로 진) 저 빚을 빨리 갚아 하나님 영광되게 해야 할 텐데…’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면서 “그분의 기도 제목은 ‘이 외진 곳 성도들 위해 주의 종을 좀 보내 주십사’였다”고 덧붙였다.
남한산성은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러나 1960∼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목회자 모시기가 힘든 오지였다. 버스조차 들어오지 않던 시절, 교인들은 어렵게 모신 목회자를 맞으러 서울 천호동이나 송파나루까지 나갔다. 장정 걸음으로 2∼3시간 거리였다. 그만큼 목자 세우기가 쉽지 않았다.
새벽 4시 화목(火木) 때고 새벽기도 준비
“교회가 반석 위에 자리한 것은 60년대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60년대 초 부임한 최화종 목사님이 교회 부흥에 힘쓰셨거든요. 6·25 때 ‘빨갱이’ 사건으로 교인 등 많은 사람이 희생됐죠. 교회도 불타 없어졌고요. 그 후 최 목사님의 노력 등으로 지금 예배당 아래 ㄱ자 한옥을 매입, 이를 개조해 예배당으로 사용했어요. 화목(火木)을 때던 시절이었죠. 새벽 4시에 일어나 난로에 화목 넣어 새벽기도회 준비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습니다.”
곽 장로는 남한산성관리사무소 직원으로 정년퇴직했다. 따라서 그에게 남한산성은 집이며, 직장이며, 신앙의 공간이다. 그 신앙은 아들 영근(43·서울 광진구 좋은교회 부목사)씨에게 이어졌다.
그들과 같은 신앙인이 있어 남한산성과 남한산성교회는 유구할 것이다. 그들은 억새를 베어 초가 예배당을 이었고, 청기와를 올려 만년의 성전을 다졌다.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는 말씀을 믿고 따른 그들이었다.
한경직 목사 “마을에 교회를 왜 또 세우려 하나?”
남한산성교회는 주일 60∼70명이 출석한다. 주일학교 학생까지 포함하면 100여명이다. 2009년 최영준 목사가 부임한 이후 주일학교가 부흥했고 청년부가 활성화됐다. 남한산성 지역은 산성리를 포함한 90여개 식당을 중심으로 500여명의 주민이 살아간다. 남한산성은 1970년대 성남시가 개발되면서 도로가 뚫렸고 80년대 수도권의 손꼽는 관광지로 인기를 끌었다.
이 산성마을에 교회가 하나뿐인 이유가 있다. 서울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1902∼2000)는 은퇴 후 이곳 소박한 기도처(19.8㎡)에서 생활했다. 그의 거처엔 침대와 이불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교인이 이 마을에 장로교회를 세우려고 했다. 그러자 한 목사는 “성결교회(남한산성교회)가 있는데 그럴 필요가 있소?”라고 말렸다고 한다. 남한산성교회 목회자는 부임하면 반드시 한 목사를 찾아 인사를 했다. 한 목사가 있던 곳은 지금의 영락여자신학원이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