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사는 최모(40)씨는 내년 다섯 살이 되는 아들의 유치원 진학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유치원 추첨 대란' 속에서 최씨 아들은 동네 일반유치원에 당첨됐다. 앞서 최씨는 일반유치원 탈락에 대비해 인근 신사동 영어유치원에 입학금을 내 둔 상태였다. 그 와중에 동네 엄마들 사이에서 "유치원에서 만들어진 커뮤니티가 나중에 엘리트 인맥으로 이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이 동네에서 비싼 영어유치원 안 나오면 초등학교에 올라가서 소외된다"고까지 했다. 영어유치원 학비는 월 90만원대로 일반유치원의 세 배나 되지만 결국 최씨는 어렵게 붙은 일반유치원을 포기하기로 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벌주의가 일부 명문고와 특목고를 거쳐 어느새 슬금슬금 유치원까지 내려왔다. 과거에는 대학만 잘 가면 엘리트 취급을 받을 수 있었지만 요즘은 영어유치원, 국제초·중학교, 국제고·특목고로 이어지는 ‘명문대 코스’를 밟아야 ‘순혈 엘리트’가 될 수 있다는 말도 나돈다. 취업 이력서에 유치원까지 적어야 하는 시대가 올 거라는 우스개마저 나오고 있다.
◇외면 받는 일반 초등학교들=유치원에서 시작된 신종 학벌 계급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더 세분화된다. 1980∼90년대에는 일부 ‘극성’ 학부모들이 서울 강남과 종로 일대의 사립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려고 위장전입 등의 편법을 썼다. 대부분의 학부모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 배정받으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같이 뛰어놀던 옆집 친구가 초등학교 친구가 됐고, 대부분 같은 중학교에 진학해 학창 생활을 이어나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학력 인정과 더불어 내국인 입학을 허용하는 국제학교가 급격히 늘면서 이제 일반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면 교육에 신경을 덜 쓰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까지 형성됐다.
일부 학부모들은 국제학교 간 ‘등급’을 놓고도 왈가왈부한다. 경북 포항에 사는 A씨는 다섯 살 딸아이를 집 근처 국제학교에 보내려다 최근 제주도로 마음을 돌렸다. 부유층 자녀들이 내국인 입학이 자유로운 제주도의 국제학교들로 몰린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아이에게 ‘인맥’을 만들어주려면 무조건 제주로 보내라”는 지인의 조언도 있었다. A씨가 눈여겨본 학교들은 연간 학비가 1200만∼1900만원이나 되지만 그는 “아이 미래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했다.
국제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경우 차선책으로 영어유치원으로 다시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있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B씨의 일곱 살 딸은 인근 아파트단지 내 공립초등학교에 배정됐다. 사정상 먼 곳의 국제학교까지 보낼 수 없었던 그는 아이를 영어유치원 오후반에 등록시켰다. 이곳에서는 승마와 플루트 등 과외활동도 도맡아준다. B씨는 “대부분의 영어유치원은 학원 형태라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계속 다니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대학 학비보다 비싼데 자리가 없다=국제학교 학비는 웬만한 사립대학을 뛰어넘는다.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프랑스계 국제학교. 하교하는 아이들 대다수가 우리말을 쓰는 한국인이었다. 이 학교의 올 입학금은 300만원, 등록금은 연 1030만원이다. 여기에 기숙사비 월 51만원과 기타 부대비용을 합하면 1년에 내야 하는 돈은 1500만원 수준이다.
그럼에도 자리가 없어서 못 들어갈 정도다. 이 학교는 규정상 내국인 입학 비율이 30%로 제한되는데, 지난해 교육청 감사에서 전체 재학생 211명 중 91명이 부정입학생인 것으로 드러났다. 주로 강남구와 종로구 일대 의사와 법조인 등 부유층이 서류를 위조해 아이를 입학시켰다.
이런 현상은 고등학교에서 먼저 시작됐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추진 중인 특목고 및 자사고 지정취소 정책이 같은 맥락에서 비롯됐다. 특목고와 자사고가 범람하면서 일반고에 진학한 학생들은 본격적인 수험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공부 못하는 아이’로 낙인찍혀야 했다.
학부모들이 이렇게 열을 올리는 이유는 ‘좋은 동창 인맥’ 때문이기도 하다. 일부 유치원에서는 졸업생 학부모들이 나서 주기적으로 동창회를 열고 아이들을 억지로 교류시키기도 한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대학에서 국제학교 출신이 상대적 강세를 보이는 글로벌 전형이나 특기자 전형을 계속 만들고 있고, 수출에 주력하는 대기업에 들어가기도 유리한 현실이 이런 극단적 결과를 만들어냈다”며 “조기교육이 기득권에 접근하고 취업시장에서 살아남는 전제조건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
유치원까지 내려온 학벌주의
입력 2014-12-11 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