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미스핏츠’

입력 2014-12-11 02:30

국내에서도 방영된 영국 드라마 ‘미스핏츠(Misfits)’는 10대 청소년 6명의 이야기다. ‘부적응자’란 뜻의 제목처럼 모두 말썽을 피워 사회봉사명령을 받는다. 봉사활동 첫날 우박과 함께 떨어진 번개를 맞았는데 각기 다른 초능력이 생겼다. ‘켈리’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기 시작했고 ‘커티스’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게 됐으며 ‘사이먼’은 필요할 때마다 투명인간이 됐다.

할리우드 영화였다면 이들은 지구를 구했을 것이다. 이 드라마의 상상력은 조금 다르다. 함께 번개를 맞은 감독관이 살인마로 돌변하자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감독관을 살해한다. “번개 때문에 그리 됐다”는 얘기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며 시신을 조용히 묻어버렸다. 그리고 사건을 추적하는 경찰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초능력을 사용한다.

스펙 목표가 취업에 맞춰진 한국 청년들

지난주 연세대와 고려대에 ‘최씨 아저씨께 보내는 협박편지’란 대자보가 붙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최씨 아저씨’라 부르며 ‘저는 좀 화가 나 있습니다’로 시작해 ‘우리 같이 좀 삽시다’로 끝이 난다. 대자보의 발단은 최 부총리의 ‘정규직 과보호’ 발언이었다. 이렇게 썼다.

“아저씨, 제 친구들은 평균 1300만원 빚을 지고 대학을 나갑니다. 취업도 힘들어서 1년 정도 ‘취준’(취업준비)하는 건 찡찡댈 축에도 못 끼고요. … 우리가 취업 못하고, 창업 망하고, 집 못 사면 우리 부모님 세대도 죽어난다고요. 엄마 아빠가 가진 부동산을 우리가 안 사주면 집은 누가 사고, 부모님 받으실 연금은 누가 내나요.”

이 글을 쓴 학생들은 ‘20대의 뉴스’를 표방하며 인터넷 신문을 운영하는데 그 이름이 ‘미스핏츠’다. 대표 박진영(23·여·연세대 국문학과)씨는 “저 드라마 속 아이들의 속사정을 보면 꼭 우리 얘기 같다”고 했다. 굉장한 초능력을 갖고도 자신을 지키는 게 더 급한 아이들, 엄청난 공부와 화려한 스펙을 쌓는데 그 목표가 살아남기 위한 취업에 맞춰져 있는 한국 청년들. 큰 뜻을 품기엔 앞가림이 너무 절박한 처지가 어딘가 닮아 있다.

‘최씨 아저씨…’는 온·오프라인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대자보를 읽은 한 대학생이 미스핏츠에 이런 글을 보냈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비정규직입니다. 아버지는 정리해고를 당해 건축 일을 하시고, 어머니는 공장 일용직입니다. 대학에 다니며 돈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의구심이 듭니다. 뭘 그리 잘못했기에, 미친 듯이 알바하고 밤새 공부하는데 삶이 나아진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걸까요. 치열하게 살면 뿌듯해야 하는데…. 빨리 돈 벌어 서울에 보금자리 하나는 만들어야지 하면서 학점 관리하고 스펙 쌓는 현실, 이제 좀 미워해보렵니다.”

1980년대 대자보는 시국을 논하는 매체였다. 나라의 현실을 고민하며 격정을 담아내곤 했다. 세상이 바뀌면서 대자보도 바뀌었다. 2010년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글이 고려대에 붙었다. ‘입시’ 관문을 통과하니 ‘취업’ 관문이 기다리고 있더라, 대기업에 ‘부품’ 공급하는 하청업체 같은 대학을 떠나 다른 삶을 찾아보겠다는 거였다.

불안이 서서히 분노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4년 만에 등장한 ‘최씨 아저씨…’가 취업을 바라보는 시선은 좀 달라졌다. 한층 절박해졌다. 박진영씨는 “대자보를 쓰고 나니 ‘정말 그렇게 힘드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다들 정말 그렇게 힘들어한다. 정윤회니 국정농단이니 떠들썩한 사건이 터져도 ‘어, 이건 뭐지’ 할 뿐이다. 그런 데 관심 갖기도 벅차다”고 했다.

이런 글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청년세대가 느끼는 불안이 있다. 이런 글이 나왔다는 건 그 불안이 서서히 분노로 바뀌고 있음을 말해준다. 미스핏츠는 대자보의 생각을 정리해 최 부총리에게 진짜 편지를 보낼 거라고 한다. ‘최씨 아저씨’는 그 편지에 어떤 식이든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답이 충분치 않으면 다음 편지는 ‘박씨 아줌마’께 갈지도 모르겠다.

wjtae@kmib.co.kr

태원준 사회부장